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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가 어려운 중등, 초등이 미리 알아 두면 정말 좋은 세계사 이야기 13) 중세 유럽 - 3) 비잔틴제국, 중세문화

초등공부로수능잡기 2022. 12. 2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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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와 그 동쪽을 차지하고 로마의 전통을 간직한 채 오랫동안 나라를 이어갔다. 특히 비잔티움이라 불렸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로 정한 이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더욱 번성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먼저 게르만 족을 비롯해 슬라브 족, 훈 족과 싸워야 했고,.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도 국경선에서 늘 맞섰게 된다.

이 가운데 비잔티움 제국을 가장 번성시킨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였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오현제, 콘스탄티노플의 로마의 영광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노력들로 인한 여러 건축물과 세금 등의 문제로 비잔틴 제국의 시민들의 부담이 커지게 되었고,.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수많은 관리가 죽고 마침내 반란군이 궁궐로 쳐들어왔다. 너무나 깜짝 놀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궁궐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아내 테오도라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말렸고, 테오도라의 설득에 용기를 얻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급히 군사를 모아 반란군과 싸워 가까스로 반란군을 물리쳤다.

 

이 후, 한숨을 돌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실현시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게르만 족에게 잃어버린 서로마 제국의 땅을 되찾아야 했는데, 가장 뛰어난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반달 족을 공격하게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점령하고(533~534년), 시칠리아까지 손에 넣었다.

이때 로마 사람들은 벨리사리우스를 ‘해방자’라 부르면서 좋아했다. 더 나아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게 된다.

무려 20년 동안 힘든 싸움을 벌인 끝에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보낸 장군 나르세스가 승리를 거두게 되고, 또한 이탈리아를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로 만들게 된다(554년). 여기에 더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반달 왕국의 남쪽마저 손에 넣게 된다. 이로 인해 지중해가 접해 있는 땅을 되찾게 되었고, 지중해가 다시 ‘로마의 호수’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자꾸 일어나는 통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도시 곳곳이 파괴되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집과 건물을 다시 짓게 했고, 불탄 교회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옛 로마의 전성기 모습을 하나씩 되찾아 갔다. 뿐만 아니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수백 명의 학자들을 모아 비잔티움 제국을 다스릴 법률을 만들게 했다. 학자들은 옛 로마의 법률은 물론이고, 그리스와 여러 나라의 법률을 모으고 분석해서 새로운 법을 만들었는데, 바로 《로마법 대전》이었다. 

 

이 법전에는 백성의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조항이 많이 들어 있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법으로 강력하게 다스리고,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실제로 《로마법 대전》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운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로마법 대전》은 《시민법 대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도 불리며 중세 유럽에 전해졌고, 많은 나라의 법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오늘날 시민법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노력으로 옛 로마의 영광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세상을 떠나자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또다시 이민족이 제국의 영토로 쳐들어왔고, 마침내 비잔티움 제국은 랑고바르드 족과 프랑크 족에게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빼앗겼다. 이후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이슬람 세력에게 시리아와 이집트를, 서고트 족에게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까지 빼앗겼고, 급기야 비잔티움 제국에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쪽의 영토만 남게 되었다. 그러던 8세기 초반에는 이슬람 세력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다행히 레오 3세(재위 717~741년)가 이들의 침략을 가까스로 막아 낸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의 수호자, 셀주크 튀르크 족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뺏기고, 그 곳에는 오스만 제국의 터키 공화국이 설립되게 된다. 

* 반드시 시험에 나오는 부분

1)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특징 : 황제가 교황권을 가진 중앙집권적국가 (황제의 권한이 막강함)

2) 키예프 공화국(러시아)에 영향을 미침 (그리스정교 : 키예프 공국의 종교)

3) 그리스어 공용어, 그리스 정교

4) 전성기 :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로마법 집대성), 성소피아 성당(모자이크, 돔 양식)

 

 

중세 유럽의 문화 (종교중심 : 철학은 신학의 시녀)

 

5~9세기 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여러 민족이 활동했다. 이 무렵 크리스트교가 각 나라의 종교로 자리 잡았는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땅을 넓힐 뿐만 아니라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궁정 학교를 세우고, 수도사들을 시켜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게 했는데, 이 당시 수도사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 없이 가난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며,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한곳에 모여 수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이 모여 생활했던 곳을 수도원이라 부른다.

 

수도사들은 소박하게 지어진 수도원에서 정해진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성경을 공부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수백 명의 수도사들에게 성경을 베껴 쓰도록 했으며, 수도사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책을 베껴 써서 학문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고, 고전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이때의 수도원은 학문을 연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중심지이자 고대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를 ‘카롤루스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된 뒤부터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했는데, 그 덕분에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오가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고, 이민족을 물리친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 성 소피아 성당을 지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리스와 가까워서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동방으로 나가는 길목이기도 해서 종교, 문화에 동서의 특징이 골고루 반영되었다. 이 곳에 건설된 성 소피아 성당은 여러 색의 돌, 유리 등을 붙여서 그림을 나타내는 모자이크 기법으로 지어져 겉으로 보기에도 화려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웅장한 돔이 한 개가 아니라 커다란 한 가운데의 돔을 여러 개의 작은 돔들이 감싸고 있으며, 건물 안의 벽에는 자주색과 초록색 돌이 쌓여 있다. 돔이나 천장, 벽에는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었다. 이는 로마의 양식에 동쪽 지방의 요소가 더해져 더욱 화려해 보였다.

 

이와 같은 비잔티움의 예술은 훗날 이슬람 여러 국가의 예술에 영향을 미쳤으며, 뿐만 아니라 북쪽의 슬라브 민족, 키예프 공국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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