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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가 어려운 중등, 초등이 미리 알아 두면 정말 좋은 세계사 이야기 14) 중세 유럽 - 4) 교황권의 우세(카노사의굴욕), 중세유럽의 변화(십자군전쟁과 봉건제의 몰락)

초등공부로수능잡기 2023. 1. 17.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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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황과 황제의 충돌 : 교황권의 우세 : 카노사의 굴욕

중세 서유럽을 받쳤던 기둥 하나가 봉건 제도였다면, 또 다른 기둥은 크리스트교였다. 

9~10세기를 지나면서 거의 전 유럽에 퍼져 나간 크리스트교는 서유럽 사람의 국교가 되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너도나도 교회에 땅을 바쳤고, 교회는 많은 넓은 땅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땅을 많이 가진 교회는 봉건 제도의 영주와 같은 힘을 쓸 수 있었다. 교회가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왕 못지 않은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서유럽의 교회를 대표하고 있던 로마 교회의 교황은 국왕들조차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뽐냈다. 그러던 중 교황과 국왕은 ‘누가 더 최고의 권력자인가’를 두고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싸움 중 가장 큰 문제는 ‘성직자를 누가 임명할 것인가’였다. 성직을 얻으면 큰 수입이 따라왔기 때문에 성직을 사고팔기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이탈리아 출신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다음과 같이 공표하였다. 

 

“국왕이 성직자 임명권을 가지고 있어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성직자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는 성직을 사고파는 일과 평신도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금했다. 이 문제를 계기로 하인리히 4세와 부딪혔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5년 초, 마침내 서유럽 국가의 국왕들을 향해 선언했다.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는 교황만이 가진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생각이 달랐다.

 

“왕권도 신이 내린 것입니다. 교황만이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다니,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하인리히 4세에게 편지를 써서 교회의 뜻에 따르라는 충고를 보냈다. 그럼에도 황제는 교황의 뜻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듬해 1월에 독일의 보름스에서 국제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성직자들과 제후(영주)들로부터 동의를 얻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정을 내놓았다. 

 

이에 교황도 그를 황제에서 파문하고자 했다.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다! 이후부터 모든 사람들은 하인리히 황제와 만나지 말라. 신하들도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하지 말라.”

 

교황의 선언에 그동안 황제를 지지했던 성직자와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서 돌아섰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황은 황제를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교황을 직접 만나 잘못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비와 왕자, 신하들과 함께 교황을 만나러 길을 떠났는데,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널 때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알프스를 넘을 때에는 지독한 추위가 몰아닥쳐 온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카노사 성에 머물고 있던 교황은 문을 닫아걸은 채 하인리히 4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여러 번 부탁했지만 소용없으며, 성문 앞에는 흰 눈이 수북이 쌓였고, 칼바람이 몰아친 상황에서 황제는 아주 얇은 옷만 걸친 채, 눈밭 위에 맨발로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세 번의 낮과 밤이 지나갔고, 그제야 교황은 황제를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황제의 진심을 알았소. 파문을 취소하겠소.”

황제가 교황에게 굴욕을 당했던 이 사건은 시간이 지나 ‘카노사의 굴욕’이라 부른다..

 

황제는 성으로 돌아오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언젠가는 이 굴욕을 꼭 되돌려 주리라!’

그렇게 마음먹은 황제는 궁궐로 되돌아와 왕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한동안은 교황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얼마 후, 황제를 배반하고 교황 편에 섰던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를 대신해 루돌프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교황도 찬성을 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뒤, 황제가 수많은 성직자와 제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막강한 지지 세력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이번이야말로 기회라 생각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를 물러나게 하고, 새로운 교황을 세우겠다!”

 

우선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후들을 없앴다. 그리고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갔다. 하인리히 4세는 순식간에 로마를 점령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강제로 내쫓았다. 

 

이후에도 교황과 황제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죽은 뒤,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가 다시 보름스에서 만났고, 그동안 다툼의 원인이었던 성직자 임명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다.

 

“앞으로 성직자 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인정합니다.”

“성직자들에게 내리는 토지에 관한 문제는 국왕이 알아서 하시오.”

 

얼핏 보면 교황과 황제, 양쪽에게 공평하게 결정이 난 듯했지만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이 가졌다는 사실은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2) 십자군 전쟁의 시작

중세 시대에는 크리스트교가 크게 번성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성지 순례는 아주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슬람 왕조인 셀주크 튀르크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더니 크리스트교도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교도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지고 말았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이번 기회로 교황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비잔티움의 교회까지 로마 교회로 통합하고자 했다.

곧 교황은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긴 우리의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아야 합니다.”

 

3백여 명의 성직자들이 동의했고, 이에 따라 수많은 성직자들이 유럽 곳곳을 돌며, 시민들에게 십자군에 참가하라고 권했다.

 

마침내 우르바누스 2세가 모은 십자군은 1097년, 오늘날의 터키 지방인 소아시아를 공격했다. 그리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이슬람 병사는 물론 보통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고 함부로 죽였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했고, 예루살렘 왕국 등 네 개의 크리스트교도 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유럽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후퇴한 이슬람교도가 세력을 키워 반격을 준비하는 데에 깜짝 놀라 다시 십자군을 꾸렸다.

 

“이번에야말로 이슬람교도들을 싹 쓸어버릴 테다!”

 

두 번째로 모인 십자군(1147~1149년)은 서둘러 소아시아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은 더욱 강해진 이슬람군에게 크게 지고 말았다.

 

훗날, 12세기 후반이 되자 이슬람교도들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위대한 장군’이라 불리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된 살라딘이 이슬람 세계를 합친 후, 예루살렘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187년 7월, 살라딘은 잘 훈련된 병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들은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이 전쟁은 신의 명령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이슬람교도들도 예루살렘을 되찾는 싸움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에게도 메카와 메디나 다음으로 신성한 성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예루살렘 국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성에서 나와 하틴의 뿔들이라 불리는 두 산봉우리 사이에 진을 쳤어요. 이를 눈치 챈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 국왕의 군대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살라딘 병사들은 숲과 계곡에 불을 질렀다. 예루살렘 왕국의 군사들은 우왕좌왕 하면서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병사 3만 명이 사로잡혔고, 국왕도 포로가 되었어요. 이 전투를 하틴 전투라 부른다. 

살라딘은 승리를 거듭하며 같은 해 9월, 예루살렘 왕국의 성을 포위하고 외쳤다.

 

“만약 성에서 나와 항복한다면, 시민은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한 사람당 금화 열 닢, 여자는 두 닢, 아이는 한 닢을 내면 풀어 주겠다. 만약 몸값이 없다면, 내가 빌려 주겠다!”

 

살라딘은 십자군과는 다르게 포로들에게 너그러웠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포로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은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겼다는 사실로 인해 충격에 빠졌고, 또다시 십자군을 만들었다.

세 번째 십자군에는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그리고 용감무쌍해서 사자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영국의 리처드 1세가 앞장섰다. 특히 리처드 1세는 성을 팔고, 기사 작위까지 팔아 전쟁에 필요한 돈을 끌어모았다. 

 

“이제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을 것이다!”

 

리처드 1세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사람들도 리처드 1세를 믿었다. 실제로 이슬람군도 리처드 1세가 십자군에 참가한다는 소식에 겁을 먹을 정도였다. 

 

마침내 리처드 1세는 1191년, 지중해를 거쳐 시리아의 해안 지방인 아레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슬람군에게 포위되었던 프랑스군을 구해 내는 등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리처드 왕은 행군 도중 열병에 걸리고 말았으며, 이슬람의 이름난 장군 살라딘의 활약에 가로막히게 된다.. 더구나 리처드 1세가 영국을 비운 사이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아 전쟁을 포기한 채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휴전을 조건으로 요구 사항 하나를 내밀었다.

 

“예루살렘이 살라딘 그대의 땅임을 인정하겠소. 그러나 우리 유럽 사람들이 성지 순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결국 3차 십자군(1189~1192년)은 성지 순례 권한 외에는 아무런 얻는 것 없이 막을 내렸다.

 

프랑스 북부 지방의 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모인 4차 십자군 원정(1202~1204년) 때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는커녕, 크리스트교도가 사는 도시를 공격해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재산을 빼앗고 사람들을 죽여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가장 추악했던 4차 십자군 원정은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뒤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십자군은 이후에도 네 번이나 더 꾸려졌고, 1212년에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한 소년을 따라 수천 명의 소년이 십자군 원정을 나서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 십자군들은 나쁜 상인들에 의해 모두 노예로 팔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끊임없이 십자군이 나섰지만 유럽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되찾는 데 실패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중세 유럽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우선 신과 성직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바뀌어, 더 이상 성직자를 우러러보지 않았고, 믿음도 식었다. 교황의 권위는 추락하였고, 교회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십자군 운동에 참여했던 영주와 기사들도 힘이 약해졌다. 전쟁을 위해 재산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영주와 기사들은 몰락했고, 이를 계기로 중세 시대를 받치고 있던 봉건 제도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세력이 커진 쪽은 국왕과 도시의 시민이었다. 특히 상업과 무역을 하던 시민들은 여기저기 오가며 재산을 늘려 나갈 수 있었고, 국왕도 나중에는 이들과 손을 잡고 왕권을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우리가 장원에서 기른 농작물이 충분히 먹고 세금을 내고도 남아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요?”

 

이무렵 장원 제도를 중심으로 농업에 전념하던 유럽의 중세 사회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농기구가 발달하지 않아 땅을 제대로 갈아 엎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농작물을 많이 거둘 수 없었지만 이민족의 침입이 잠잠해지면서 장원에서 키우는 농작물이 많아졌고, 가축을 이용하고 땅을 깊게 팔 수 있도록 쟁기를 더 좋게 만드는 등 새로운 농사 방법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노들은 남은 농작물들을 내다 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업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화폐를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 부터이며, 이제 농사를 짓기보다 생산물을 판매하는 일에 매달리는 상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상인들은 도시로 모여들었고, 도시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팔며 생활 터전을 삼았다.

아울러 물건을 만드는 수공업자들도 도시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애초에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도시에서 상업이 발달하자 상품을 운반하고, 보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상인과 수공업자가 도시에 자리를 잡자, 사람들이 먹을 빵을 만드는 빵집과 고기를 파는 푸줏간, 대장간 등도 생겨났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 덕분에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먼 거리까지 나가 상품을 팔 수 있게 되었는데, 상인들은 십자군을 따라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특산물을 맞바꾸고, 지중해 연안을 따라 활발하게 물건을 사고팔았다. 이에 따라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성장했지고, 그 뒤를 이어 오늘날의 폴란드와 스웨덴 사이 발트 해와 북해에서도 무역이 활발해졌다. 이즈음에 북부 독일과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이 크게 발전했다.

이와 같이 유럽 곳곳의 도시 규모와 경제력이 빠르게 커졌으며, 더 나아가 유럽을 가로질러 흐르는 다뉴브 강 상류와 라인 강 주변의 도시들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 도시들은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하기 위해 자유와 자치권을 갖고 싶어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시는 여전히 영주의 지배가 미치는 지역이어서 여러 규제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영주들은 화폐를 만들 권리와 온갖 특권을 독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법을 내세워 도시민들을 마음대로 다스렸고, 강제로 부역을 시키기도 했다.

 

“안 되겠어요. 차라리 돈을 주고서라도 영주에게 자치권을 삽시다!”

 

도시가 자치권을 얻으면서 도시의 주민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장원의 농노들에게는 무척이나 부러운 일이어서 도시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 는 말이 유행이 되었다.

 

이렇게 자치권과 자유를 얻자, 도시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합을 만들었다. 이 조합이 바로 길드로, 길드는 중세 유럽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조합이었다. 그들은 상품을 거래하다가 배가 뒤집혀 피해를 보거나, 해적을 만나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서로 조합원들이 협력하여, 보상이 되어 주기도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세력이 아주 커져서 영주와 협상을 하기도 했고, 도시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상인 길드를 이어 수공업자들의 길드도 형성되었다. 이들은 장인과 직인, 도제라는 신분으로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장인은 그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들은 한두 명 정도의 직인과 도제를 거느리고 있었다. 직인은 장인 밑에서 약간의 돈을 받으며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었고, 나중에 장인 밑을 벗어나 스스로 수공업자가 되려는 사람이었다. 직인은 기술을 잘 배우고 연습한 후 길드가 정한 규격에 맞춰 심사를 받고 독립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도제가 되려면 약 7년 동안 장인의 집에 머물며 심부름을 하다가 조금씩 기술을 익혀야 했다..

 

이들이 모인 길드는 자급자족에 만족하던 장원 제도가 무너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수공업자나 상인이 물건을 마음대로 만들고 팔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것은 자유로운 거래와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기도 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이제부터는 땅을 빌리는 값을 돈으로 내도 되는 거예요?”

돈 때문에 장원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까지 농노들은 영주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농산물을 내거나 부역을 해 주었는데 이제는 영주들이 대가로 돈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이제 농노는 늘 일정한 돈만 내면 되었고, 조금 더 부지런하면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농노들은 영주에게 더 많은 돈을 내고 노예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 이런 일이 유럽 전 지역에서 점점 많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즈음, 유럽 곳곳이 자연재해에 시달렸는데 14세기 초부터 기후 변화가 일어나 겨울이 더욱 추워지고, 습기가 많아졌다. 심지어 흑사병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1347년 흑사병이 이탈리아를 휩쓸더니, 이듬해 초에는 프랑스를, 이어 가을에는 영국까지 퍼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몇 년 뒤에는 북유럽은 물론 러시아까지 다다랐다.

일단 흑사병에 걸리면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시체가 거리에 그냥 놓여 있기도 했다. 시체를 묻더라도 대충 땅을 파고 묻는 정도였고, 장례를 치러 줄 성직자도 부족할 지경이 되었다. 가족이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빈집이 늘어 갔고, 도시는 유령이라도 나올 듯 텅 비게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시가 너무나 불결해서라고 짐작했다. 실제로 중세의 도시들은 가축의 똥오줌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고, 물을 마시고 버리는 시설 역시 매우 지저분했다. 또 십자군 전쟁 이후 활발해진 다른 나라와의 무역 때문에 아시아나 이집트에서 번져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유럽 사람들은 이렇게 정확한 원인을 모른 채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흑사병은 남녀노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어떤 도시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양을 비롯한 가축들마저 수천 마리씩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유대 사람들이 샘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누가 퍼뜨린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런 헛소문은 흑사병만큼이나 빠르게 퍼졌다. 그러자 곳곳에서 유대 사람을 마구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교황이 이를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사실 크리스트교를 믿는 중세 유럽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다 예수를 죽였다며 미워했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나타나서 발가벗은 채 온몸을 채찍으로 때리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흑사병은 신이 내린 벌이라고 믿고,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채찍질 했던 것이다.

 

불과 4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유럽은 흑사병으로 사람들이 하도 죽어서 일할 사람이 없어졌고, 농토는 남아돌게 되었다. 사려는 사람이 적어지다 보니 식량을 비롯한 물건 값이 내려가고 덩달아 돈의 가치도 떨어졌다.

 

영주는 난처해졌다. 농사지을 땅은 남아도는데, 자기 땅에 농사를 지어 줄 농노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주는 농노를 아주 잘 대우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귀한 일손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농노의 지위가 높아지자 영주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쳇! 이러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농노의 눈치나 보게 생겼는걸!”

결국 영주는 농노를 또다시 이전의 장원 제도 아래에서처럼 억압하고, 자신의 영지 아래 묶어 두려 했다. 하지만 농노는 더 이상 예전의 농노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농노의 반란이 일어났다. 농노들은 영주의 성과 귀족들의 저택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에 귀족과 영주는 가족을 데리고 도망치게 되었으며, 영국군의 공격으로 메말라 못 쓰게 된 땅과 영주의 억압 때문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이 반란을 ‘자크리의 난‘이라고 부른다. 자크리는 농노들을 부르는 별명이었는데, ‘시골뜨기’라는 뜻이다. 

 

영국에서도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농노 반란이 일어났다. 농노들은 여러 도시를 차례로 점령해 나갔고, 런던으로 진격해 물건을 빼앗고 불을 질렀다. 런던타워로 몰려가 그 안에 몸을 피한 국왕을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고, 농노들은 숫자는 많았지만 가진 무기라고는 칼과 나무 방망이가 고작이었다. 활을 쏠 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결국 농노들은 군대를 끌어들인 영주와 귀족들에게 아주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반란을 계기로 영주의 힘과 권위는 이전에 비해 약해졌고, 농노들의 이와 같은 반란은 장원 제도와 봉건 제도가 무너지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더 나아가 도시로 도망친 농노들은 풍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영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왕권을 상비군과 관료제로 지지했다.

이로써 지방분권적인 중세유럽의 봉건사회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왕권 중심의 세대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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