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5-2 사회) 일제 시대 : 중, 고 국사까지 한 번에 정리 * 매우 중요 -1)흥선대원군과 강화도조약

5학년사회수능어휘

5-2 사회) 일제 시대 : 중, 고 국사까지 한 번에 정리 * 매우 중요 -1)흥선대원군과 강화도조약

초등공부로수능잡기 2022. 12. 10.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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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 중엽 국외 정세

1) 박규수, 베이징을 다녀오다 : 청의 패배, 서양의 강호를 만나게 되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번진 공포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모든 일이 중단되었고 부자나 넉넉한 집안 사람들은 산골로 도망하였다. 관직을 그만두는 관리도 수두룩하였다. 처자식의 손에 보물을 쥐어 주고 서둘러 떠나보낸 대신들도 많았다. - 《한국 천주교회사》

 

다소 과장 섞인 이 글은 1860년 서울에 있었던 어느 외국인의 기록이다. 이 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을 침략하여 여러 차례 승리하며 중국의 수도까지 함락시켰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자 세계의 최강국'이라 믿고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당시의 상황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의 배들이 우리 해안에도 잇달아 나타났다. 이를 우려하였던 조정에서는 중국에 사람을 보내 실상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이때 박규수도 청을 다녀왔다.

 

여러 날이 걸려 중국에 도착한 박규수는 중국의 패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으며, 서양 세력이 두려운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도 정치로 정치는 부패하였고, 민심은 조정을 떠난 상태였다. 수많은 고을에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개혁을 요구하였지만, 조정은 그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당시 서양의 침략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시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 베이징에 입성하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는 베이징에서 중국과 조약을 맺고 많은 항구를 열게 했다.

 

* 학습정리 - 반드시 시험에 나오는 세계사, 국사

 

1) 19세기 우리나라의 대외 정세 : 

서양 열강들의 침략적 접근 : 이양선(서양의 배)들이 우리 바다에 등장하여 통상을 요구

2) 청과 영국의 아편전쟁 : 아편전쟁에서 청의 패배로 중국보다 강한 나라에 대한 인식이 형성됨

* 청의 지정은제와 공행무역이 원인이 된 청과 영국의 아편전쟁 (반드시 시험에 남)

* 청의 지정은제 : 청 이전의 국가 명의 세금 제도인 '일조편법'은 각종 세금을 토지세와 부역세로 묶어 은으로만 내게 한 제도인데 청대에 이 제도가 지정은제로 이어진다. 청나라는 부역세를 토지세 속에 포함시켜 단일세로 징수하게 되었는데 이를 지정은제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청은 은을 화폐로 사용했기 때문에 청과의 무역에서는 은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영국과 청의 무역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영국의 은은 대량으로 청에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은의 유입에 영국은 불만을 일으켜 아편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 청의 공행무역 : 공행은 나라에서 민간 상인 조합에게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말하며, 

이러한 공행 무역은 명나라, 청나라때 이루어지며 광저우를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이에 당시 중국과 무역을 하려면 이 공행에게 승낙을 받고 무역적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중국이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영국 등에 수출하였지만 당시 중국의 물품이 매우 인기가 있던 터라 영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무역을 할수록 적자를 보는 상황이었다. 결국 영국은 이와 같은 무역의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아편을 재패해 청에 아편밀무역을 하게 되는 삼각무역을 행하였고, 나중에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 아편전쟁

19세기 영국은 청나라에 모직물과 면화를 수출하고 청나라로부터 홍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특히 홍차를 많이 사 갔는데 청나라는 은을 받고 홍차를 팔았다. 이에 따라 엄청난 양의 영국 은이 청나라로 흘러 들어가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손실을 보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과의 무역을 제한하고 있었다. 

광저우라는 항구만 열고 공행(서양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정부의 허가를 받은 상인 조합)과만 거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공행제도).  이는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는 것이 싫었던 데다 서양 수입품들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문화국수주의).

청나라는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네 땅에서 기르고 만들 수 있는 자급자족하는 나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계속된 손해를 보자, 청나라에 물건을 팔 수 있는 지역을 넓혀 달라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영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영국은 어떻게 하면 무역으로 인한 손해를 해결할 수 있을까 궁리하였고, 영국은 청나라가 약으로 쓰려고 아편(양귀비꽃의 진으로 만든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수입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 뒤로 영국은 청나라 정부 몰래 청나라 시장에 아편을 팔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아편이 밀수입되자 청나라에는 아편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영국은 아편 수출로 많은 돈을 벌었고. 결국 영국이 수입하는 홍차의 양보다 중국이 수입하는 아편의 양이 더 많아졌다.

이에 청나라는 아편을 들여오는 것을 금지하고 광저우에 특별 관리 임칙서를 보냈다. 

임칙서는 광저우에 있는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이에 영국은 이 일을 빌미로 1840년 6월, 청나라를 공격했고,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불행히도 청나라는 영국을 감당할 만한 힘이 없었다. 

지방 관리들은 부패해 있었고, 중앙 정부도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청나라의 해안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위협했다.

결국 1842년 8월, 청나라는 영국에 항복하고 난징 조약을 체결했다. 

난징 조약으로 영국은 다섯 개의 청나라 항구에서 자유롭게 무역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홍콩 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난징 조약은 청이 외국과 처음으로 맺은 근대적 조약이나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조약었다.

< 2 >    19세기 중엽 국내 정세 -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기강, 삼정의 문란

- 세도정치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탕평정치는 조선의 힘이 아니라 뛰어난 왕, 개인의 힘이었다. 이는 정조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영향력이 들어나게 된다. 정조의 즉위를 시작으로 탕평책은 중단되었고, 순조이후 헌종, 철종에 이르는 60년 동안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 등이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시대가 형성되었다. 

세도정치란 주로 왕의 외척 가문이었던 소수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고위직을 독점하여 갖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정치이다. 그들은 비변사를 근거지로 삼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흥선대원군-비변사 기능 축소, 의정부와 삼군부 부활 : 매우 중요)

- 삼정의 문란

삼정은 전정과 군정, 환정(환곡)을 일컫는다. 이 제도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동시에 백성들을 돕기 위해 만들었다. 

전정은 땅(토지)에 매기는 세금을 뜻하고, 군정은 병사로 일하는 대신 군포를 납부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한창 바쁜 농번기에 어른 남자가 군역 때문에 자리를 비우면 살림이 어려워지므로 군포로 대신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환정은 흉년이나 식량이 떨어진 춘궁기에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는 제도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삼정이 관리들의 수탈과 부정부패로 인해 혼란스러워지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고단해졌다. 

먼저 전정의 문란은 땅을 조사하는 사업인 양전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세금을 매길 기초 자료가 없자,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제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었다.

못 쓰는 땅이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땅에 세금을 매기기도 했다.

군정도 문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군역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에게 부여되는 의무였다. 

하지만 탐관오리들은 어린아이나 이미 죽은 사람의 몫까지 군포를 거두고, 군포를 내지 않고 도망칠 경우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내게 했다.

삼정 가운데 백성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것은 환곡이었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빌려주면서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받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고달프고 가난해졌다. 뿐만 아니라 환곡을 운영하는 관리들은 쌀을 빼돌린 뒤에 거짓 장부를 꾸미기도 했다.(흥선대원군이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운영 : 매우 중요)

이에 정부에서는 암행어사를 보내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단속하도록 했지만 상황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이에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저항하기 시작했다. 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등도 삼정 문란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 대원군의 등장 : 왕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민족의 위기가 깊어지고, 민심이 조정을 떠났다며 걱정하는 관리들이 늘어났다.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도 점차 많아졌다. 

이 무렵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어 정권을 잡았다. 대원군은 민심이 조정을 떠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의 원망을 샀던 조세 제도를 뜯어고쳤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제를 폐지하였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물렸다.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세금을 내지 않던 사람을 찾아냈다. 또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이 민중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은 왕권을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려운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을 다시 짓는 데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수많은 농민이 많은 세금과 강제 노동으로 큰 고통을 겪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도 대원군도 서양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라 안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천주교가 널리 퍼지는 것을 막아 전통 풍속을 지키고 서양인과 내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 학습정리 * (모두 매우 중요)

1) 삼정의 문란

- 전정 : 곡식이 나지 않는 황무지에도 세금을 걷음

- 군정 : 군포를 2중, 3중으로 걷고, 16~60세 남자만 징수 대상이나 어린 아이, 죽은 사람까지 군포를 걷음

- 환곡 :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약간의 이자와 함께 가을에 거두는 빈민구제 창고가 대출을 원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억지로 대출을 주어 고액의 이자를 물게 함

2) 흥선 대원군의 정치 개혁

- 인사 개혁 : 안동 김씨 축출,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 제도 개혁 : 비변사 축소, 폐지 : 의정부와 삼군부 부활

- 법전 정비 :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편찬 : 통치 규범 정리

- 수취 체제 개혁 : 양전실시, 호포제 실시, 환곡제 폐지 후 사창제 실시

                             양전 = 토지조사 = 조세 부과 대상에서 누락된 토지 적발 후 세금 부과

                             호포제 = 양반에게도 군포 징수

                             사창제 = 부정과 폐단이 많던 환곡제 폐지 후 실시

- 서원 철폐 : 붕당의 근거지로 변질되고, 농민을 수탈하던 서원을 대폭 정리 

                   : 지방통제강화, 민생안정, 재정확충 : 47개소만 남기도 모두 철폐 : 훗날 흥선대원군 퇴진의 배경이 됨

- 경복궁 중건 : 왕실 권위 향상을 위해 추진 : 원납전과 당백전 발행으로 양반, 백성의 원성을 삼

(참고 자료)

1. 비변사 : 조선 후기에 나랏일을 전반적으로 총괄한 기구. 

('비변사'라는 이름의 '비'가 비상지를 뜻한다고 생각하고, '변'을 변방으로 바꾸어 기억해 보세요.)

국방 문제를 담당하던 비변사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의정부를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 기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빠르게 의사 결정을 할 필요가 생겼다. 

이전처럼 의정부와 대신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은 전쟁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 국방 관련 일들을 처리하던 비변사에서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다. 

즉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비변사에서 처리한 것이다. 

처음 비변사는 국가적인 재난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최고 기관이었으나 전쟁 후에는 과거 의정부와 6조에서 하던 일을 비변사에서 그대로 하게 되었다.

수령의 임명부터 외교 · 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처리하였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기능이 커진 비변사는 군사 문제를 협의하는 관청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왕비나 세자빈의 간택까지도 처리하는 등 모든 나랏일을 보게 되었다.

이후 효종과 현종 때에도 비변사의 정치적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주요 정책을 몇몇 사람이 모여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될수록 권력은 몇몇 사람에 집중되어 왕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개혁한 사람은 다름 아닌 흥선 대원군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비변사를 없애버렸다.

또한 비변사 이후로 조선 초기에 수도를 방위하는 5위 체제는 임진왜란 후 5군영 체제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중 급하게 훈련도감이라는 군사 관련 기구가 만들어진 것을 시작으로 필요에 따라 4개가 더 생겨 5군영 체제가 되었다.

지방군도 임진왜란 이후 속오군 체제가 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지방군의 수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깨달은 조선은 양반에서 노비까지 모든 신분으로 구성된 속오군을 만들었다. 

속오군은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일이 생기면 지역을 방어하였다.(속오군 ; 매우 중요)

2. 양전 : 토지조사

양전은 세금을 걷고자 토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땅의 위치, 소유주, 땅의 품질 등을 조사하여 그 내용을 양안[토지대장]에 기록하는 것이고, 국가는 이를 바탕으로 세금을 부과했다.

그런데 세금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토지를 빼거나 실제 가지고 있는 면적보다 줄여서 등록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을 "은결"이라고 한다. 이는 삼정의 문란 때, 외척들에 의해 많이 형성되었고, 흥선 대원군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양전을 실시했다. 이와 같은 양전은 고려시대 때부터 실시 되었던 토지 조사이다.

양안에 기록된 토지의 수가 줄어든다면, 토지에 세금을 매기는 국가의 재정도 줄어든다. 그렇기 때문에 흥선 대원군은 양전으로 국가의 재정을 늘리려 한 것이다.

3. 사창제

민간에서 곡식을 저장해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는 제도이다. 

환곡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국가 단위로 실시하던 환곡을 폐지하고 향촌(마을) 단위의 사창제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삼정에 문란에서는 민간이 아닌 국가에 관리가 곡식을 대여해 주는 방식이 었다면, 사창제는 민간이라는 점에서 좋은 제도였으나, 이 것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반발로 시행되지 못했다.

4. 원납전과 당백전

원납전은 원해서 납부하는 세금이다.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할 당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양반과 백성한테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걷었다. 하지만 기부금이 아닌 반 강제로 돈을 걷어서 백성들의 불만이 컸다.

당백전은 경복궁 중전을 위해 제작된 화폐로 상평통보의 백배 가치를 지닌 화폐이다. 

하지만 실질 가치는 겨우 5배에서 6배에 그쳤고. 명목상 100배 였다. 

그리고 당백전을 대량 생산해서 나라에 뿌렸고 돈이 넘쳐나게 되면서 화페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물가가 과하게 상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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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물리치다

대원군의 개혁에 박규수는 지지를 보냈다. 개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대원군도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은 박규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규수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자신의 뜻을 펴도록 도왔으며, 박규수의 생각처럼 신무기를 개발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것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프랑스는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 모두를 거부하였다. 대원군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라 선언하고, 모든 이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군대는 여러 곳에서 침략자를 물리쳤다. 특히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했다. 결국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 및 수많은 재물, 문화재를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1866, 병인양요)

 

더 나아가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는 통상을 거절당한 보복감에 미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게 된다. 이 사건들로 서양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1866, 제너럴셔먼 호 사건)을 추궁하였다. 아울러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였다. 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다.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 이것이 대원군의 답이었다.

이에 전투가 다시 벌어졌다. 미군이 강화도를 공격하자, 수많은 조선 병사가 장렬하게 맞섰다. 

미군은 결국 물러갔다.(1871, 신미양요)

 

- 척화비 (서양 및 일본과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강화)

미국과 전쟁을 끝낸 뒤, 흥선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석에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서양에게 문호를 내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명이다. 

 

- 이 난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1860년대는 우리 민족에게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위기의 순간이었던 한편,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다양한 생각들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지금은 서양의 침략에 나라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시기이다. 외국과 국교를 맺어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 -오경석 (개화사상)

 

서양은 침략자일 따름이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과 당당히 맞서자. / 경복궁을 다시 짓기보다는 민생 안정에 힘써야 한다. -이항로 (위정척사운동)

 

서양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 나라를 구하고 민중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특별 방안이 필요하다. / 서양에 맞서 싸워 우리 문화를 지키자. / 신분 차별과 남녀 차별을 없애 평등한 새 세상을 만들자. -최제우(동학)

 

- 운요 호 사건

그러던 중 1875년 일본은 운요 호라는 군함을 강화도에 침투시켰다. 군사 충돌을 유도해 침략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여러 차례 포격전이 오간 뒤 운요 호는 영종도를 약탈하고 돌아갔다.

 

- 강화도 조약 체결

일본은 운요 호 사건을 일으킨 이듬해 1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다시 나타나 배상과 국교 수립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전쟁을 피하고 개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 강화도 조약과 부속 조약들

· 부산과 원산, 인천 세 항구를 열어 일본인이 왕래하고 통상하도록 한다.

· 일본인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한다.

· 조선에서 일본인이 죄를 지어도 조선 정부가 재판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 (이상 강화도 조약)

· 조선에서 일본 화폐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강화도 조약 부록)

· 조선은 일본 상품에 대하여 일체의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조·일 무역 규칙)

(학습정리) : 매우 중요

1. 천주교의 확산과 병인박해

- 천주교의 확산 :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 조선 교구의 설치 : 서양 배척 여론 대두

- 흥선 대원군의 초기 대응 :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 했으나 실패 : 이후 천주교 금지, 서양 문물 수입에 대한 반대 여론 고조 이후 병인박해(1866)

- 병인박해(1866) :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천주고 신자 처형

2. 병인양요(1866)

  • 원인 : 병인박해 당시 9명의 프랑스 신부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가 통상 요구
  • 경과 : 프랑스군이 강화도 침입, 한성근 부대의 문수산성과 양헌수 부대 정족산성이 격퇴
  • 결과 : 프랑스군이 물러나면서 외규장각 도서 및 무노하재 약탈

3.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 발단 :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올라와 평양 부근에서 통상 요구
  • 경과 : 조선의 퇴거 요구에 불응, 약탈과 인명 살상
  • 결과 : 평양 관민의 공격으로 제너럴 셔먼호 소실

4.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 통상을 거절당한 독일인 오페르트가 미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 : 서양에 대한 반감 고조

5. 신미양요(1871)와 척화비 건립

  • 발단 :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을 구실로 미국이 배상금 지불 및 통상 요구 : 조선 정부의 거부
  • 경과 : 미국 함대가 강화도 침입, 초지진과 광성보의 함락, 어재연의 항전(광성보전투), 미군퇴각
  • 결과 : 척화비 건립(서양 및 일본과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강화)

6.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 내용 : 서양 여러 나라의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함
  • 의의 :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음
  • 한계 : 서양의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함.

7. 통상 개화론의 대두

  • 주요 인물 :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 자주적으로 서양 문물과 근대적 제도를 수용, 근대적 개혁을 이루어야 함을 주장

8. 강화도 조약의 체결(1876)

  • 배경 : 흥선 대원군의 하야, 통상 개화론의 대두, 운요호의 사건(1875)의 구실로 한 일본의 무력 시위
  • 내용 : 부산 외 2개 항구(원산, 제물포) 개항, 일본의 해안 측량권 및 치외 법권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

* 치외법권 : 외국인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국가의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권리

                   :   일본인은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조선의 죄로 처리할 수 없다.

  • 성격 : 조선의 문호 개방,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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