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5-2 사회) 일제 시대 : 중, 고 국사까지 한 번에 정리 * 매우 중요 -2)조,미통상조약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거문도 사건

5학년사회수능어휘

5-2 사회) 일제 시대 : 중, 고 국사까지 한 번에 정리 * 매우 중요 -2)조,미통상조약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거문도 사건

초등공부로수능잡기 2022. 12. 12.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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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 미 통상 조약의 체결(1882)

청나라는 1860년 러시아에 연해주를 할양하고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고,

청나라는 조선에게 "더 이상 우리가 지켜줄 수 없으니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어야 세력 균형으로 조선이 안정"된다고 보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위정척사파들의 득세로 서양의 수교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청나라의 정치가 이홍장의 다음과 같은 강력한 주장에 의해 조선은 미국과의 수교가 형성된다.

그는 "미국과 영국은 무역 이익을 추구하지만 러시아는 영토를 빼앗는다"며 "조선 조정이 영미와 조약을 맺어 러시아에 대비하야 한다"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와 서양의 수교를 도왔다.

더 나아가 당시 조선에는 1980년에 일본의 근대 문물을 시찰하러 갔던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인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이 배포되었는데, 이 책에서도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청과 친하고, 일본과 미국에 연결되어야 한다 주장하였다.

고종은 미국이 영토에 야심이 없고, 조선에 변고가 생기면 중재해 줄 것을 기대하며, 미국과 수교할 결심을 하였으나 위정척사 운동을 진행했던 보수적 양반 유생들은 집단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조 미 수호 통상 조약은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 인정 등의 불평등한 조약이 포함되어 있는 서양의 최초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을 계기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불평등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고, 우리나라는 이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중심의 근대적 국제 질서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과의 모든 조약은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 최혜국 : 통상이나 항해 조약 등에서 한 나라가 제3국에 부여한 가장 유리한 대우를 조약 상대국에 부여하는 것

<2> 정부의 개화 정책

1. 통리기무아문(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와 별기군(신식군대) 설치

* 통리기무아문 : 1990년 청의 총리아문을 본떠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행정기구이다. 개화 정책과 관련된 국가의 중요 행정을 담당 하였다.(매우 중요)

* 별기군 : 1881년 고종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된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과 중국에 사신을 보내 근대 문물을 배워 오게 하였다.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기존 구식군대에 비해 급료나 피복 등 모든 대우가 좋았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로 인해 구식 군인들이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군사 제도가 바뀌면서 별기군은 사라지게 된다.(매우 중요)

2. 시찰단과 유학생의 파견

일본에 수신사와 조사 시찰단을 파견하여 근대 문물과 제도 시찰을 하였다.

또한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는데 유학생을 보내 근대 무기 제조법과 군사 훈련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3>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 위정척사 운동은 보수적 양반 유생충에 의해 형성된 운동

정부가 추진하는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전개한 운동이다. 성리학을 공부한 많은 유생들은 일본을 서양 세력과 동일시하여 오랑캐라 여기며, 그들과 교역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운동을 ‘위정척사 운동’이라고 하는데, 위정척사(衛正斥邪)란 ‘바른 것(正)을 지키고(衛), 사악한 것(邪)을 배척(斥)한다.’는 뜻이다.

위정척사 운동은 크게 4단계로 추진된다.

첫 번째 단계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며 외세의 군사적 위협이 본격화했던 시기로, 위정척사사상은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펼치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위정척사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항로와 기정진 등인데, 이들은 서양의 경제적 침략이 가져올 폐해에도 주목하면서 통상반대론(通商反對論)을 주장했다.

* 1860년 서양의 통상 요구 반대 운동 :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 지지 : 이항로, 기정진

위정척사운동의 두 번째 단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을 전후로 한 시기이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민씨 세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물려받은 고종은 일본이 1875년 9월 운요호사건을 일으키며 통상조약의 체결을 압박해오자 이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이를 계기로 위정척사사상이 새롭게 고조되었는데, 이 시기의 위정척사사상은 첫 번째 단계와는 다르게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성격을 나타나게 된다.

외세의 침략이 일본의 통상조약 강요라는 형태로 나타남에 따라 개항반대론과 함께 일본과 서양이 한 통속이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김평묵, 최익현 등이다.

*1870 강화도조약 체결이 원인 : 최익현 : 개항반대운동(왜양일체론, 개항불가론 주장)

위정척사운동의 세 번째 단계는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황쭌센이 지은 '조선책략'을 가져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 주재 청 나라 참사관이던 황쭌센은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 정책을 펼쳐야 하며, 각 나라와 통상을 확대할 뿐 아니라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파견하고 서양인 교사를 초빙해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교와 천주교는 근원은 같지만 당파가 다르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종지로 하므로 포교를 허용해도 조선에 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종은 <조선책략>을 정부 관리뿐 아니라 유생들도 읽도록 하였는데, 1881년 3월 경상도의 유생들은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선두로 '영남만인소'를 올려 <조선책략>의 내용을 격렬히 비판하였다.

이 상소에는 영남 지방에서 1만여명의 유생이 참여하였는데, 그 뒤를 이어 관동·경기·호서·호남의 유생들도 집단상소를 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사상은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개화반대론의 성격을 띠고 나타났으며, 유생들의 참여가 당파를 넘어서 집단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자기의 도(道)를 기반으로 하되 서양의 기기(器機)를 수용하자는 오도이기론(吾道異器論)이 제시되어 사상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였다.

*1889년 : 조선책략 유포가 원인 : 이만손, 홍재학 : 개화반대운동(영남 만인소)

1890년대 이후 위정척사사상은 반침략·반외세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며 의병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이듬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을미개혁을 추진하자 이소응, 유인석 등은 의병운동을 벌였다.

을미의병은 국수보복이라는 반침략의 목표를 내세웠지만 반개화의 보수성도 지니고 있었고, 유생 지도부의 사상적 한계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나타난 을사의병에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여 유생 의병장의 의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 시기에 활약한 유생 의병장으로는 최익현, 민종식 등이 있다.

* 1890년 :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원인 : 유인석, 이소응 : 항일의병운동(을미의병)

<4> 임오군란(1882)

정부의 개화 정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개화론과 척사론이 대립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민씨 세력과 흥선 대원군 세력 사이의 갈등, 일본 세력의 침투에 대한 국민의 반발 등이 얽히면서 정치는 점점 혼란을 겪게 되었다. 더 나아가 정부가 추진한 개화 정책(통리기무아문, 별기군)은 유생뿐만 아니라 도시의 하층민과 구식 군인들에게도 반발을 샀다. 개항 이후 일본으로 쌀이 유출되면서 곡물 가격이 크게 올라 하층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 군대인 무위영과· 장어영의 군인들은 별기군보다 낮은 대우를 받고, 급료마저 제대로 받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13개월 만에 겨우 급료로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그들의 불만이 일시에 폭발하였다.

 

이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하층민들이 합세하여 군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질렀다. 

그러나 하나부사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구식 군인들의 지지를 받던 흥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흥선 대원군은 군란을 진정시키고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폐지하는 등 개화 정책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이 군대를 파견하였고, 군란의 책임을 묻는다며 흥선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 감으로써 임오군란은 끝을 맺었다.

 

임오군란의 영향

임오군란이 수습된 후,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군사 고문과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리고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맺어 청 상인이 조선의 개항장뿐만 아니라 내륙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청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서로 대립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압으로 제물포 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군이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 세력과 보수 세력의 갈등으로 나타나 갑신정변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 임오군란의 배경 : 정부의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과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탈

* 발단 :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의 봉기

* 경과 : 구식 군인의 봉기에 도시 빈민층이 가세 정부 고관과 일본 공사관 습격

흥선 대원군의 재집권 청의 흥선 대원군 납치 민씨 세력의 재집권

* 결과 : 청의 내정 간섭 심화 : 군대 주둔 및 고문 파견,

조, 청 상민 수력 무역 장정 체결로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시됨

: 제물포 조약 : 조선이 일본에 뱁상금 지불

: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 주둔 허용

참고) 임오군란 이후 청에서 파견한 고문 : 마젠창,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였다.

특히 묄렌도르프는 독일인으로 외교 고문으로 해관의 총세무사로 일하면서 민씨 세력과 손잡고 업무를

추진했고, 급진 개혁파인 김옥균과 대립하였다.

<5> 갑신정변(1884)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개입으로 조선의 정치는 다시 민씨 세력들이 주도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개화파들이 기대한 만큼의 속도감 있는 개혁은 추진되지 못했다. 이 무렵, 개화파는 두 부류로 나뉘어 되었는데, 김윤식과 김홍집으로 대표되는 온건 개화파는 강자가 약자를 사정없이 잡아먹는 생존 경쟁이 치열한 국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차근차근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청나라의 양무 운동처럼 서양의 기술 문명만 받아들이는 온건한 방법의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반면에 김옥균, 박영효와 같은 사람들은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조선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 속에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서구의 문물뿐만 아니라 제도와 정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완전히 서구식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이들을 급진 개화파 또는 개화당이라 한다.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정부는 온건 개화파가 주도하며 청나라의 양무 운동식 개혁을 추진해 나갔고,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급진 개화파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청나라는 조선에 파견했던 군대의 절반을 베트남 전쟁에 보냈고, 청의 군대가 절반으로 줄어들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 세력은 일본 공사로부터 정변에 필요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약속 받은 다음,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을 1884년에 일어난 이 정변을 ‘갑신정변’ 이라고 한다.

급진 개화파들의 이와 같은 정변은 잠시 성공하여, 고종의 승인하에 새 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만들어 조선의 자주권 확립 및 문벌 타파, 조세 제도 개혁 등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난을 일으킨 지 3일 만에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청의 개입으로 실패한 것도 있지만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은 바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소수 상층부 지식인 위주의 개혁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당시 민중들은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지나치게 컸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협력한 갑신정변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매우 중요)

그러나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지향한 우리나라 근대화 운동의 선구였다. 개혁 내용도 조세 제도의 개혁이나 탐관오리 처벌, 문벌 폐지, 인민 평등과 같이 일반 백성들의 입장을 반영한 참신한 것이었다.

허나 정변의 실패로 김옥균을 비롯한 정변의 주역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조국을 떠나야 했다. 이제 조선 정부 내에서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은 사라지게 되었고, 청의 내정 간섭은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한편 일본은 일본 공사관이 불탄 것과 일본인이 죽은 것에 대한 대가로 한성 조약을 조선 정부와 체결하여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냈다.

또한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과 일본도 조약을 맺었다.(톈진 조약). 이 조약에서 청·일 양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동시에 철수하되, 장차 조선에 군대를 보낼 필요가 있을 때는 사전에 먼저 상대국에게 통보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후일 청·일 전쟁(1894)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매우 중요).

* 학습정리 *

- 갑신정변(1884) 배경 : 임오군란 후 청의 간섭 심화, 정부의 소극적 개화 정책, 청-프 전쟁

- 중심인물 :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의 급진 개화파

- 경과 :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 도모후 개화당 정부 수립, 개혁 정강 14개조 발표 : 청의 군사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 ; 청의 내정 간섭 심화 : 한성(조-일)조약, 텐진(청-일)조약(청-일전쟁원인) 형성

- 개혁 정강 14개조 : 청에 대한 자주권 주장, 문벌 타파, 군주권 제한, 지조법 개혁 등

- 한계 : 일본에 의지한 민중들의 지지가 없던 급진적 개혁

<6> 거문도 사건

19세기 후반에 조선이 나라의 문을 연 이후 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아시아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조선을 자신들의 세력 아래 두려고 했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와의 교류를 추진했다. 내심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 싶어했던 러시아는 이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러시아가 1884년 조선과 조약을 맺고 베베르를 조선 공사로 파견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자, 조선을 눈여겨보던 여러 나라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을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서 러시아와 부딪치던 영국은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이 커지는 것에 위기를 느꼈다.

결국 영국은 1885년 조선의 영토인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 거문도는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있는 섬으로 서남해의 요충지(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였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요새화한 뒤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군함과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에 조선은 영국의 불법 침략에 강하게 항의했고, 청도 영국군의 침탈을 빌미로 러시아와 일본의 군대가 들어올 것을 우려해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영국군은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듣고 1887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 거문도 사건 :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비밀 협약 추진

: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1885)

* 결과 : 중립화론 제기 : 독일인 부들러와 유길준 등이 조선의 중립국화를 주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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