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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가 어려운 중등, 초등이 미리 알아 두면 정말 좋은 세계사 이야기 5) 튀르크공화국(터키)

초등공부로수능잡기 2022. 10. 2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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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이슬람 제국을 이끌었던 압바스 왕조는 13세기 중엽 몽고군에게 무너진 뒤, 서아시아 지역은 몽고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고군은 바그다드를 정복한 후 80년 동안 이란과 그 주변을 지배했다. 이에 따라 이란 지역의 많은 투르크족이 몽고군을 피해 소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왔다. 

이들은 크리스트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의 국경 근처에 자리를 잡고, 여러 소왕국을 세웠다. 

 

이러한 투르크족 가운데 오스만 1세는 동쪽의 강력한 몽고군을 맞서고, 약해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뺏으며 힘을 키웠다. 이에 1300년쯤 오스만 왕조가 건설되었다. 

오스만 1세의 아들 오르한은 소아시아 북서부의 상업도시 부르사를 정복해 오스만제국의 수도를 삼았다. 

부르사는 아시아의 비단길과 지중해를 잇는 길목으로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 후 오르한은 부르사를 발판으로 비잔티움을 계속 공격했고, 바다를 건너 발칸반도까지 상륙했다.

 

1362년에는 발칸 반도의 심장부인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한 무라트 1세는 이곳을 ‘에디르네’로 이름을 바꾸고, 그리스 북부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까지 점령해 발칸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지역만 겨우 차지한 도시 국가로 몰락했다. 오스만 제국의 승리는 술탄의 친위 부대인 ‘예니체리’ 덕분이었다. 이는 술탄에 대한 충성심과 용맹으로 무장한 부대로 14세기 말엽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을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일대의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 떠오르게 하는 절대적 기반이 되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이 가장 눈독을 들였던 곳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와 비단길로 이어지는 동서 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의 본격적인 비잔티움 제국의 정복은 15세기 중엽의 일로 당시 술탄이었던 메메트2세는 우선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모든 선박을 검문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오가며 교역하던 유럽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이에 콘스탄티노플의 경제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다. 후에 메메트 2세는 이전의 두 배나 큰 대포를 설치했고, 육군 역시 철저히 병력을 배치했다. 

 

1453년 봄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원정을 시작한 메메트2세는 마침내 53일의 공방전 끝에 1453년 5월 28일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게 되었다. 메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상징이자 그리스 정교인 본산인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가서 이슬람식 예배를 드리고, 크리스트교의 시대가 끝나고, 이슬람교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고치고,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한편 메메트2세는 오스만 제국의 통합을 위해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주민들(그리스정교인, 유대교인 등)을 하나의 자치 구역에 살게 하며, 자신들의 언어, 종교, 관습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이 사는 하나의 자치 구역을 ‘밀레트’라 하고, 밀레트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는 대신 술탄에게 충성을 바쳤다. 오스만제국은 밀레트제를 통해 정복지의 반발을 최소화하여 더욱 영토확장에 힘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5세기 말 흑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하고, 베네치아 왕국과 평화 협정을 맺어 지중해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1481년 메메트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주변 세력의 반발이 커졌다. 특히나 페르시아 지역의 사파비 왕조는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을 위협했다. 

그러나 메메트 2세의 손자인 셀림1세가 술탄이 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다시 아랍, 이집트 공략에 나서 사파이 왕조를 차지하였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도 정복했다. 맘루크 왕조는 몽골족에 의해 무너진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제도를 되살려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행세를 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이로써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이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 후 셀림1세의 아들, 술래이만 1세는 유럽을 공략해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술래이만 1세는 1520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헝가리의 관문인 베오그라드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요새들을 점령함으로 유럽으로의 확장을 도보했다. 1526년에는 헝가리를 점령해 속국으로 만들고, 오스트리아의 빈 지역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빈 지역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다. 술래이만 1세는 두 번에 걸친 원정으로 10만 이상의 빈의 포로들을 붙잡고, 합스부르크 왕가에 심한 타격을 입혔지만 빈을 함락시키지는 못 했다. 그러나 유럽 세계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하고, 힘을 합쳐 오스만 제국을 대항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종교적 이유도 작용).

 

또한 오스만의 해군 역시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1538년 알바니아 부근의 프레베자 해안에서 오스만 제국은 승리를 했고, 술래이만 1세는 홍해, 페르시아 만 일대에 해군 함대를 주군시켰다. 더욱이 술래이만 1세는 지중해 패권을 가지고 옴으로 지중해 해상권을 바탕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잇는 교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술래이만은 홍해, 페르시아 만 일대에 해군 해병을 주둔시키고, 인도양을 손에 넣고자 했다. 왜냐하면 신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교역선들이 인도로 진출하면서 인도, 중동, 유럽을 잇는 오스만 제국의 교역로를 타격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해군은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계속된 전쟁을 일으켰고, 마침내 인도양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로써 술래이만 1세 때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유럽의 헝가리,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아라비아 반도의 이란 국경까지 뻗어 갔다.

* 시험에 반드시 나오는 부분 *

1) 오스만 제국의 형성 원인 : 몽골족의 압바스 침략으로 인한 소아시아 지방으로 셀주크 튀르크족의 이주

2)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의 근원 : 예니체리 부대

3)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 슐레이만 1세 : 지중해 확장 : 십자군 원정의 원인

오스만 제국은 슐레이만 1세의 죽음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여전히 유럽에 위협적인 16세기 말부터로 볼 수 있다. 술탄들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능력이 없었고, 부를 쌓아 누리는 데에만 힘썼기 때문이다. 

 

술탄의 자질이 이와 같이 떨어진 원인은 술탄 계승 제도의 변화에 있다. 오스만 제국 초기에는 여러 왕자들 가운데 유능한 왕자가 술탄이 되었는데 이를 위해 술탄은 왕자들을 지방 총독에 임명해 능력을 살폈다. 그런데 술탄의 자리에 오른 왕자는 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일 권리가 있었는데 이를 ‘형제 살육’ 제도라 한다.

 

이러한 술탄 계승 방식은 잔인하긴 했지만 뛰어난 왕자를 술탄으로 뽑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초 지나친 살육으로 술탄의 자리를 이을 사람이 어린 왕자들밖에 남지 않자, 왕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술탄이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더불어 왕자의 지방 총독 임명 제도가 없어지고, 왕자들을 별궁에 머무르게 했는데, 이렇게 되자 왕자들은 술탄이 되어서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점차 술탄들은 나랏일을 재상과 관료들에게 맡기도 하렘에서 사치스러운 파티와 유흥만 즐겼다. 

또한 하렘의 여인들이 술탄을 조정하며 오스만 제국 내에 권력다툼이 증가하게 된다.

여기에 예니체리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군대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이들에게 지불할 급료의 증대로 왕실의 부담이 커졌다. 또한 예니체리 역시 부패하면서 예니체리들은 정복 전쟁 대신 지방의 농촌 마을을 약탈했고, 세력을 키워 술탄을 갈아치우며 한때는 중앙 정부를 지배하기도 했다.

또한 대서양을 통해 동방의 값비싼 물자가 유럽으로 직접 흘러 가면서 오스만 제국은 동서 무역의 주도권을 잃었고, 17세기부터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지중해를 지배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다.

슐레이만 1세의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은 이렇게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참고) 하렘 : ‘출입을 금하는 처소’로 이슬람 사회의 부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하렘은 귀족이나 부자들의 내실이나 궁전에 있었는데 특히 궁전 안의 하렘은 규모가 컸다. 

궁전 안의 하렘에서 최고 권위자는 술탄의 어머니이고, 그 다음은 술탄의 아내 였으며, 환관들은 하렘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규율을 잡았다.

 

슐레이만 1세 때, 오스트리아의 빈을 공격해 10만 명의 포로를 잡았던 오스만 군대는 1683년 다시 한 번 원정길에 올랐다. 전쟁을 통해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영토를 넓힘으로 재부흥을 꿈꾸었던 것이다.

 

오스만 군대가 빈을 향해 돌진하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는 겁을 먹고 달아났다. 그러나 빈을 지키던 오스트리아 군대와 시민들의 완강한 버팀,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유럽 나라들의 도움을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궁지로 몰리며, 본격적인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에 시달리던 유럽은 동맹을 맺어 대항했다. 유럽의 중심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중심으로 베네치아, 폴란드, 러시아까지 가담한 유럽 동맹은 점차적으로 오스만으로부터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했다. 

 

결국 1699년 오스만 제국은 유럽 동맹과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어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베네치아에게 내주었다. 그러다 18세기 내내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의 전쟁을 통해 점차 영토를 잃었고,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짐으로 다른 지역의 반란도 잦아졌다.

 

더욱이 유럽과 러시아는 발칸 반도 사람들의 반란을 지원하며 오스만 제국을 궁지로 몰았다.

마침내 1841년, 이집트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총독인 무함마드 알 리가 독립을 선언했고,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지역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은 사라져 갔다.

*카를로비츠 조약 : 1699년 오스만 제국은 빈을 공격한 대가로 유럽과 새로운 국경 조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약화되었고, 유럽은 오스만 제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벽에 부딪힌 개혁 정책)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 이후 유럽은 전통적 생활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 한편 유럽을 위협하던 막강한 오스만 제국은 날이 갈수록 유럽에 밀렸고, 유럽의 강한 군사력에 맞서야 했다.

1789년 술탄의 자리에 오른 셀림 3세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오스만 제국의 발전을 위해 유럽의 신식 기술과 군사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는 유럽의 각국에서 군사 교관을 데려와 유럽식 군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럽화 정책’이 시작되자, 오스만 군대의 주력을 이루었던 ‘예니체리’의 반발이 거세졌다. 

1807년 예니체리는 자신들이 누리던 지위와 특혜가 사라질까봐 반란을 일으켰고, 셀림 3세를 내쫓고, 

무스타파 4세를 술탄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채 1년도 안 돼 다시 궁정 쿠데타가 일어났고, 1808년 마흐무드 2세가 술탄이 되었다. 

그러나 마흐무드 2세도 셀림 3세처럼 개혁을 하고자 하였다.

 

(탄지마트 개혁)

1826년, 젊은 장교 세력을 중심으로 마흐무드 2세는 예니체리 부대를 없애고, 새로운 유럽식 군대를 만들었다. 

그는 예니체리의 땅들을 모두 빼앗었고, 반발하는 예니체리는 주저없이 처치했다. 

이러한 변화는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고, 관리 교육을 위한 신식 학교와 의과 대학들이 생겼다. 또한 새로운 도로를 놓았고, 유럽의 우편제도, 번역 전문 기관을 세워 외국의 앞선 학문을 권장하고, 유럽 공관을 세워 유럽의 언어와 문화를 알렸다. 

 

이와 같은 마흐무드 2세의 개혁 정책은 그의 아들 술탄 압둘 메지드와 압둘 아지즈에게도 이어졌는데,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모방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술탄의 힘을 강화하는 이와 같은 개혁 정책을 

‘탄지마트 개혁’이라 한다.

 

탄지마트 개혁으로 종교의 자유, 사유 재산의 보호, 공개 재판과 공정한 형 집행, 고문 금지 등의 법이 생겼고, 이러한 개혁적 법 정신 아래 사회 전체적으로 대개혁이 계속 이어졌으며, 더 많은 학교들을 세워 민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든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징병제를 도입해 새로운 군대를 꾸렸고, 법률 개정도 잇따라서 통상법, 해양법, 형법 등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법들이 형성되었다. 더 나아가 개혁에 필요한 돈을 위해 

세금 제도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탄지마트 개혁은 전문 인력과 재원의 부족, 보수 종교층의 완강한 저항으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더욱이 1875년 전 후, 가뭄과 대홍수로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서 외채가 증가하여 정부의 살림살이가 거의 파산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으로 1878년 러시아와의 전쟁에 패한 후 본격적인 유럽의 내정 간섭을 받으며 급속도로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특별히 술탄 압둘 메지드의 시대부터 탄지마트 개혁은 술탄의 권력을 강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여러 개혁 정책을 통해 중앙 정부의 힘을 키우기 위해 모든 권한을 술탄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그런데 압둘 메지드의 뒤를 이은 술탄 압둘 아지즈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나랏돈을 낭비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파국으로 몰아 갔다.

 

술탄 압둘 아지즈의 부당함에 대항하여 입헌 제도를 추진하던 개혁 세력은 1876년 압둘 아지즈를 술탄의 자리에서 몰아냈다. 그 후 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재상 미트하트는 술탄의 권력을 견제하는 ‘미트하트 헌법’을 만들고, 압둘 하미드 2세를 술탄의 자리에 앉혔다. 이에 압둘 하미드 2세의 이름으로 1876년 12월 23일에 ‘미트하트 헌법’이 반포되었다. 그에 따른 의회도 생겨 났고, 국정을 책임지는 내각도 구성 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 오스만 제국과 남하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하게 되었고, 1878년 오스만 제국은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의 동유럽 국가의 독립을 인정하고, 동유럽의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게 주었다. 그러자 오스만 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오스만 제국의 내정을 심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빌려간 돈을 빨리 갚으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의 새롭게 형성된 의회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압둘 하미드 2세에게 물었다.

압둘 하미드 2세는 의회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개혁 정책을 포기하고, 재상 미트하트 파샤를 파면한 후 의회를 해산시켰다. 더 나아가 과거에 막강했던 술탄의 힘을 다시 쥐어 자신을 지키고자 하였다.

압둘 하미드 2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공포했던 ‘미트하트 헌법’을 폐하고, 유럽식 개혁을 비난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압둘 하미드 2세는 유럽식 개혁을 버리고, 오스만 제국의 자주성과 이슬람 세력의 단합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을 ‘범이슬람주의 운동’이다. 

압둘 하미드 2세의 '범이슬람주의 운동'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젊은 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889년 학생 중심의 젊은 지식인들 중심의 '청년 투르크당'은 1908년 다시 입헌 정치를 펼칠 것을 

요구하며 시민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압둘 하미드 2세는 술탄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이후 10년 동안 청년 투르크당이 오스만 제국을 이끌었다.

 

* 범이슬람주의 운동 : 

크리스트교 국가에 맞서 이슬람 세계의 협력과 단결을 내세우는 운동으로 무조건 서구화가 좋은 것이 아닌 이슬람의 이념과 가치에 충실하면서 서구의 앞선 기술,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주장

 

그러나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제국을 다시 세우기에는 이미 늦었다. 잦은 정복과 정복지에서 불어온 독립의 열기로 영토가 조금씩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대제국이기를 포기하고, 투르크 민족의 살길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투르크 민족주의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민족주의 :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 유지, 확대 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나 활동

 

오스만 제국은 개혁과 혁명을 통해 회생하고자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오스만 제국은 1912년과 1913년 발칸 반도에서 두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제1차 발칸 전쟁에서 발칸반도의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의 여러 나라가 발칸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영토는 기존의 5분의 1로 줄어들었다. 

(참고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 1895. 8-을미사변, 1891.9.5.-을사조약) 

 

* 발칸전쟁 :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두 차례 전쟁으로 제1차 발칸전쟁은 발칸 동맹국인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거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제2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 제국에서 획득한 영토의 분할 문제를 둘러싸고 발칸 동맹국 간에 일어났다.

 

더 나아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국제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끈질긴 설득으로 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국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이루어진 연합국에 대항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승리하면 러시아와 유럽에 뺏겼던 영토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했으며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의 남은 영토마저 상당 부분을 빼앗았다. 그뿐만 아니라 수도 이스탄불까지 들어와 도시를 마음대로 휘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메메트6세는 나라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자신의 자리만 지키는 데 급급했다. 

 

1920년 메메트 6세는 오스만 제국에 매우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세브르 조약에 서명했고,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아랍 지역의 대부분을 뺏기고 북아프리카에 대한 모든 권리도 잃었다. 그리하여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이스탄불과 소아지아 지역 일부만 남았으며 외국 군대가 주둔하여 외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면서 사실상 독립을 잃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들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놓였다. 

이 때 한 청년 장교가 뜻을 같이 하는 젊은 장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가 바로 '케말 파샤'이다. 

케말파샤는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독립을 이루자는 국민 헌장을 통과시켰다.

이에 1920년 연합국은 이스탄불 안의 점령지를 넓히고, 많은 의회 의원을 체포했다.

그러나 케말파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앙카라에서 대국민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연합국의 눈치만 보는 오스만 제국의 정부를 무너뜨리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시민의 지지를 얻은 케말파샤는 독립군을 일으켜 정부 군대를 무찌르고,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케말파샤의 군대는 앙카라로 진격해 오던 그리스군을 몰아내며 시민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케말파샤의 국민 군대는 영국으로부터 이스탄불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그를 '이스탄불의 구원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케말파샤는 국민 의회를 설득하여 술탄제를 없애도록 하였다.

1923년 연합국과 세브르 조약을 대신하는 로잔 조약을 맺어 독립국가로서 자기 땅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1923년 10월 29일, 국민 의회는 케말 파샤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터키 공화국의 탄생을 알렸다.

*로잔조약 : 제1차 세계 대전 뒤에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대신하여 맺은 조약이다. 소아시아 지역의 영토를 되찾고,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없애는 내용으로 오늘날의 터키 영토가 정해진 조약이다.

 

케말파샤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먼저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국토의 중심지인 앙카라로 옮겼다. 

 

그리고 국민의 99퍼센트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와 함께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확실히 했다. 그 결과 칼리프 제도는 사라졌고, 이슬람 종교법 대신 근대식 법 제도를 받아들였다. 케말파샤는 개혁이 국민의 생활 속으로 익숙하도록 이슬람 남자들이 쓰던 터번과 페즈라 불리는 붉은 모자를 없애고, 공공기관에서는 여성들도 차도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일부다처제를 금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여성들에게 선거권과 참정권을 주었다. 또한 문자 개혁을 일으켜 터키 말을 기록하기 불편한 아라비아 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쓰도록 하여 국민의 교육 수준을 높였다. 케말파샤가 이끄는 터키 공화국에서는 600년간 지속돼 온 오스만 제국의 유물인 술탄제와 보수적인 이슬람교의 영향이 사라졌다.

 

터키 공화국은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믿는 이슬람교의 가치와 현대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잘 조화시키며 이슬람 국가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변화를 이루었다.

반드시 시험에 나오는 부분

* 터키의 개혁 운동 : 탄지마트, 범이슬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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