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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가 어려운 중등, 초등이 미리 알아 두면 정말 좋은 세계사 이야기 4) 이슬람왕조

초등공부로수능잡기 2022. 10. 2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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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땅이 사막으로 뒤덮인 아라비아 반도는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농사가 힘들었다. 

사람들은 가축을 이끌고 물과 풀을 찾아 떠도는 유목 생활을 하였다. 

오아시스 주변에서 농사를 짓거나 작은 도시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유목민이었다. 

유목민들은 사막의 혹독한 환경 때문에 씨족을 중심으로 부족을 이루며 유대감이 강한 민족이었다. 

부족 회의를 통해 부족장을 뽑고, 가축의 먹이가 되는 풀밭이나 사막의 샘은 부족 공동의 소유로 삼았다. 

부족 가운데 누군가가 다른 부족에게 피해를 당하면 반드시 복수했다. 

아랍 사람들에게 부족은 가장 중요한 공동체였다. 

* 사우디아 반도는 극심한 자연 환경으로 이동 생활인 유목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물이 귀한 곳이기 때문에 유목민을 환영하는 기존 사람들은 잘 없다. 텃세도 심하고, 눈치도 봐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같은 동족, 가족 중심의 부족간 유대감이 강한 민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6세기 무렵 아라비아 반도 위 동쪽의 사산왕조페르시아와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의 힘겨루기가 한창이었다. 두 제국의 전쟁으로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지중해를 잇는 동서 교역로가 막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과 유럽을 오가던 상인들은 새로운 교역로를 찾았고, 인도양을 돌아 아라비아 남쪽에 배를 대고 홍해 연안을 따라 물자를 실어 날랐다. 그리하여 메카, 메디나와 같은 아라비아 반도의 도시들이 새로운 무역지로 떠오르게 되었고, 교역의 중심지가 된 도시에서는 이전의 유목 생활을 버리고 상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특히 메카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쿠라이시족은 대상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였다. (*대상: 교역, 성지순례를 위해 여행하는 상인들) 그러나 상권을 둘러싼 부족 사이의 다툼이 치열해져서 쿠라이시족과 다른 부족이 네 차례나 전쟁을 일으켰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같은 부족 안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발생했다. 아랍 사람들은 이제 부족 간의 경쟁과 분부의 갈등을 위한 해결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무함마드 알리이다. 무함마드 알리는 부족들 간의 갈등을 하나의 종교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등을 주장한 무함마드 알리의 이슬람교는 메카 지역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무함마드 알리는 메디나로 추방당하게 되는 이를 헤지라 사건이라 부른다(매우 중요)

무함마드는 622년 박해를 피해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다. 

당시 메디나는 부족들 간의 다툼이 심각했고, 이러한 상황 가운데 무함마드는 메디나를 중심으로 종교이자 군주로서 이슬람 공동체의 기틀을 다졌다. 더 나아가 메카의 지배층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세 번의 전쟁 끝에 무함마드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고, 메카를 떠난 지 9년 만에 메카로 돌아와 이슬람교를 전파하였다. 무함마드는 632년 세상을 뜰 때까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했으며, 이슬람교의 큰 틀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에 이슬람교에서 헤지라 사건은 이슬람력으로 칭한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후, 이슬람 공동체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무함마드의 제자들은 아부 바크르를 후계자로 선출했다. 아부 바르크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무함마드 둘째 부인의 아버지로 이슬람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 중 하나였다. 또한 모두에게 존경 받을 인품의 사람으로 이슬람 지도자이자 종교적 문제에 대해 해답을 해주는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 후 이슬람 공동체는 부족장을 뽑았던 전통대로 합의에 따라 칼리프를 선출했다. 

30년 동안 네 명의 칼리프를 뽑았는데 이 시기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의 칼리프들은 무함마드가 죽고 난 후의 혼란을 잠재우고, 이슬람교를 여러 지역으로 전파하는 데 힘썼다. 더 나아가 이슬람교를 여러 지역으로 전파하는 데 힘썼으며 이슬람교를 내세워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부족을 칼리프 아래로 모으고 강력한 힘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낙타와 말을 이용한 빠른 기마부대를 앞세워 시리아 지역,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고, 사산왕조페르시아를 멸망시켰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은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이란, 팔레스타인, 이집트, 리비아 일대까지 이르렀다. 칼리프들은 정복한 땅에 총독을 보내 통치하도록 했으며 이에 이슬람 상인들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그들은 정복지에 이전의 세금보다 적은 세금을 물렸고, 무함마드가 죽은 지 20년도 안 돼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지중해까지 넓게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 부족 선출 방식으로 칼리프를 뽑던 정통 칼리프 시대는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4대 칼리프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4대 칼리프 알리의 죽음 이후, 우마위야1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자신이 총독으로 지냈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또한 자신의 친족들을 여러 지역의 총독으로 두고, 칼리프 밑에 강력한 군대를 두어 반란을 막았다.

그 후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정복하고, 북아프리카의 대서양연안까지 세력을 뻗쳤다. 

게다가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두 차례나 포위하기도 했다. 

비록 비잔틴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이 전쟁을 통해 아랍 사람들을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아위야1세는 칼리프 선출의 원칙을 어기고,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로써 전통적인 투표로 선출된 칼리프가 아닌 세습으로 칼리프를 물려받은 ‘우마이야 왕조'가 형성된다.다. 그러나 칼리프 직위를 자손에 물려주는 것은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것으로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이어졌다.

(전통적 투표 선출 주장 : 수니파 vs 세습 주장 : 시아파 ) 

그러나 우마미야 왕조는 이슬람교의 평등 사상을 무시하고, 비아랍인을 차별하는 아랍인 우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747년 페르시아 노예 출신 아부 무슬림을 이용해 이란의 호라산 지역에서 발란을 일으켰고, 

계속된 승리로 749년 아부 무슬림의 군대는 이라크의 쿠파에서 압바스 가문의 지도자 아부 알 압바스를 새로운 칼리프로 추대하였다. 이로 인해 750년 정통 칼리프 시대를 무너뜨리고 칼리프 자리를 세습했던 우마이야 왕조는 약 90년 만에 권력을 내려놓게 되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 압두르라흐만 1세는 우마이야 왕조가 파견한 총독이 지배하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웠고 이에 따라 유럽에도 독자적인 이슬람왕조가 형성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모든 사람은 알라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이슬람의 기본 교리에 충실하여 인종, 민족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등용하여 압바스 왕조의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이에 이슬람 문화의 황금기가 형성되었고, 발달된 이슬람의 학문과 예술은 문명의 빛을 받지 못했던 중세의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압바스 왕조의 기틀을 잡은 제2대 칼리프 알 만수르는 762년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김으로써 제국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공공연하게 공표하였다. 이로써 우마이야의 수도였던 바스쿠다가마 중심에서 바그다드로 이슬람 세력은 옮겨졌다.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어 외부에서 공격하기 어렵고, 육상무역과 해상 무역의 교차로에 있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이다. 또한 새로 수도를 건설하는 데 약 4년이 걸렸는데, 도시를 원형으로 설계해 중앙의 모스크와 칼리프의 궁전에서 도시의 어느 끝으로 가든 거리가 같도록 만들었다. 이는 압바스 왕조의 평등사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 모든 계층들이 조화, 협력함을 원칙으로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의 제지 기술자가 포로로 잡혀 오면서 종이 만드는 비법이 전해지면서 이슬람 문화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슬람교 신자들은 메카의 성지순례를 의무로 가지면서 지리적 지식을 위해 바닷길, 육상 교역로, 교역지 등의 정보를 습득했다. 그리하여 9세기 초부터 지형, 행정경계, 도시, 길 등이 표시된 지도가 제작되었고, 천문학 역시 발달하게 된다. 

 

8세기 초 이슬람 제국은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부터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이에 동양과 서양을 잇는 육지의 비단길, 지중해, 페르시아 만, 홍해, 인도양을 잇는 바닷길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압바스 왕조 때 마왈리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면서 민족 간 갈등이 줄고, 아랍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면서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에 압바스 왕조는 장거리 무역으로 상업 활동을 장려했다. 수도 바그다드는 동서교역과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번창했으며 이슬람 상인들은 동서 교역을 주도하게 되었다. (중국-비단, 도자기 / 인도-후추, 염색약 / 아프리카-금, 상아, 노예)

무엇보다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교는 무역을 통한 종교 전파에 힘썼던 나라이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방식이다.

그러나 압바스 왕조는 11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투르크족의 강한 군사력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투르크족(터키민족)은 이슬람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면서 이슬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갔으며, 압바스 왕조가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압바스 왕조로 부터 분열된 브와이 왕조의 페르시아와 이집트, 인도에 여러 이슬람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압바스 왕조는 이 무렵 4개의 왕조로 분리가 되었는데, 아프리카 일대의 파티마 왕조, 중앙 아시아 일대의 브와이 왕조, 유럽 이베리아 반도의 후 우마미야 왕조와 바그다드 중심의 압바스 왕조로 분열되었다.

그 중 브와이 왕조는 세력이 확장되어 압바스 왕조를 기만하고, 독자적 노선을 갖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셀주크 튀르크족이 강성해서 브와이 왕조응 처단하고, 이슬람교를 받아 들이면서 압바스왕조와 협력하여 살게 된다. (셀주크 튀르크는 압바스를 핍박하던 브와이 왕조를 처단해 줌으로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뜻의 술탄이란 칭호를 압바스 왕조에게 부여 받게 된다.)

 

그러나 후에 투르크족에 이어 더 강력한 유목민이 이슬람에 쳐들어왔는데 바로 동서 교역 길을 차지한 몽고 제국으로 압바스 왕조는 물론, 여러 이슬람 왕조 역시 무너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이슬람 왕조를 무너뜨린 몽고 제국 역시 이슬람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몽고 제국에 의해 셀주크 튀르크 족은 지금의 소아시아 반도, 즉 터키로 이주하여 지금의 터키 공화국의 시초가 되는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반드시 시험에 나는 이슬람 역사*

  1. 이슬람교의 등장원인 = 새로운 교역로(사우디아라비아 바닷길) 형성
  2. 이슬람교의 경전 = 쿠란
  3. 이슬람교의 정신 = 평등
  4. 이슬람력=헤지라사건=무함마드 알리가 이슬람을 박해하는 메카 지역을 떠나 메디나로 가게 된 사건 

(메디나에서 큰 성장을 이룬 이슬람교는 후에 메카로 귀환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5. 이슬람 왕조의 순서

1) 무함마드 알리의 이슬람교 창시

2) 헤지라

3) 정통 칼리프 시대(공정한 투표로 선출)

4) 우마미야 왕조 : 칼리프 세습(시아파:세습vs수니파:능력,투표-갈등심화):멸망원인:비아랍인차별 

5) 압바스 왕조 : 평등정책, 탈라스전투에서 승리 후 당나라 포로 중 채륜의 종이기술자로 문화 발달

* 우마미야 왕조는 후에 후우마미야 왕조를 이탈리아반도(유럽)로 진출

6) 압바스 왕조 + 셀주크 튀르크 (셀주크 튀르크=술탄, 후에 몽골에게 밀려 터키로 진출)

7) 셀주크 튀르크는 소아시아(터키)로 진출 후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오스만제국, 이스탄불 형성

** 다음 시간에는 터키(오스만제국)의 역사로 만날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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