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크 왕국의 탄생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결국 게르만 족에게 밀려 멸망하게 된다.
대신 그 땅에는 여러 게르만 민족의 국가들이 세워지게 된다(5~6세기경). 그러나 대부분의 게르만 민족의 국가들은 금세 멸망하였다. 게르만족은 적은 수의 무리가 급히 옮겨 온데다가 문화적으로 앞서 있는 로마 시민들을 오래 다스리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리아 북쪽에 자리한 프랑크 왕국만은 달랐다. 프랑크 왕국의 부족장 ‘클로비스’는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게르만족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로 합쳐 하나의 큰 왕국을 이루었다.
또한 당시 로마의 국교였던 크리스트교로 종교를 바꾸어 로마 사람들과 발 빠르게 어울렸다. 그래서 클로비스는 유럽 곳곳에 있는 로마 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프랑크 왕국은 지금의 벨기에와 프랑스 중부 지방까지 차지할 정도로 크게 자라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로비스가 죽은 뒤, 왕실은 교회에 땅을 바치기 시작했고, 왕들이 일찍 죽으면서 왕권이 약해져 갔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은 왕성해져서 동쪽으로 땅을 넓혀 나갔는데, 프랑크 왕국의 이러한 영토 확장은 동쪽 지방 귀족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결국 왕국을 움직이는 힘이 귀족의 지지를 받는 궁재(왕을 돕고, 모든 관리를 관리)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또한 프랑크 왕국은 오히려 궁재의 활약으로 더 크게 발전했다.
특히 732년, 이슬람군이 오늘날의 에스파냐와 프랑스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인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막아 유럽의 크리스트교를 보호했다. 그는 왕 대신 군사를 이끌고, 하루종일 전투를 벌였고, 프랑크 왕국은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로 궁재의 힘은 커지고,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더 나아가 어떤 백성들은 궁재 마르텔이 왕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르텔은 겸손한 자였고, 단지 궁재로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생각했다. 또한 외적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기병 부대를 정비했고, 이 기병 부대들이 훗날 중세 유럽의 중심 병력인 기사로 발전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마르텔의 아들 피핀도 궁재가 되었는데, 피핀 역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피핀은 아버지와는 달리 이름뿐인 왕을 내쫓고, 스스로 프랑크의 국왕이 되었으며, 로마의 교회 역시 이슬람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낸 카롤루스 가문을 교회의 보호자로 삼고 싶어 했다. 비로서 피핀은 로마 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국왕을 수도원에 가둔 뒤, 751년 왕위에 올랐으며, 클로비스로부터 시작된 메로베우스 왕조를 끝내고, 카롤루스 왕조의 시대를 열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로마 교황이 피핀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로마 교회가 이탈리아 북쪽을 차지하고 세력을 넓히던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이때까지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지나친 간섭을 받고 있었다. 로마 교황은 이런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잡고 로마 교회를 위협한 것이다.
이때 피핀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강한 기병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쪽 지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서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이탈리아의 중부와 북부를 차지했으며, 이 땅을 교황에게 바쳤다. 그래서 이 지역은 오랜 후에도 교황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 지역이 바로 오늘날까지 교황의 지배를 받는 ‘바티칸 시국‘이 된다.
이제 프랑크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대신하여 로마 교회의 지킴이가 되었으며,
다른 나라보다 그 위상이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서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롤루스를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서로마의 황제로 임명하고, 서로마 제국의 부활이 선언하였다.
* 반드시 시험에 나오는 부분
중세유럽의 시작 = 훈족의 압박에 의해 시작된 게르만족의 이동
(게르만족에 의해 서로마 멸망)
게르만족이 이룬 왕국 가운데 유럽의 근본이 된 국가 =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 = 카롤루스 대제(서로마 교황으로부터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를 대신해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인정 : 동로마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서로마 황제의 처사 )
프랑크 왕국의 업적 : 중세유럽 문화 형성(매우 중요) : 크리스트교+게르만만화+서로마문화
2. 프랑크 왕국의 분열(매우 중요:베르됭,메르센조약)
로마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피핀 덕분에 로마 교회를 지켜 낼 수 있었지만, 딱 한 가지가 아쉬웠다.
로마 교황을 지켜 주는 사람이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로마 교황은 옥타비아 누스 부터 오현제,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까지 왕성했던 서로마의 온전한 부활을 도모하기 위해 프랑크 왕국의 왕을 황제로 만들었다. 이에 피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혜와 용맹을 갖춘 카롤루스가 서로마의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그는 피핀의 아들로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어 크리스트교 세계를 지키고 영토를 넓히는 데 힘썼다.
카롤루스는 우선 영토를 넓히기 위해 힘썼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멀리 유럽 동부 땅 일부까지 손에 넣었다. 또한 카롤루스는 땅을 정복할 때마다 그곳의 주민들에게 성직자들을 보내고, 교회를 지었다.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옛 서로마 제국만큼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나라도 더욱 튼튼해지고 강해졌으며, 이런 소식에 교황 레오 3세도 매우 기뻐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크리스트교를 보호한 공로로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수여 받았다.
이 때가 카롤루스는 60세가 되던 해(800년)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성탄절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렸으며, 로마 교황은 제단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카롤루스에게 다가가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왕관을 씌워 주었다. 그리고 카롤루스가 로마 백성들을 지켜 줄 위대한 황제임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이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오직 당신만이 전통 로마 제국의 황제로 여겼고, 오랫동안 카롤루스 대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다가 812년이 되어서야 카롤루스 대제를 또 한 사람의 황제로 인정했다.
이후 로마 교황은 더 이상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 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으며 다른 나라의 위협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맏아들 로타리우스가 혼자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려 했다. 이에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로타리우스는 동생들에게 지고 말았다.
로타리우스와 동생들은 땅을 나누어 갖기 위해 프랑스 파리 동쪽 도시 베르됭 에서 조약을 맺었고(843년), 그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맏아들인 로타리우스가 황제라고 불리며 중부의 프랑크와 북이탈리아를 갖고, 동생 루도비쿠스 2세는 동부 프랑크를, 막내 카롤루스 2세는 서부 프랑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로타리우스가 죽으면서 자신이 다스리던 지역을 세 개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주었는데, 아들 중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사이의 중프랑크를 다스리던 로타리우스 2세가 죽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서로 그 지역을 갖겠다고 나섰다.
이로 인해 이번에는 메르센에서 조약을 맺었다.(870년)
그 조약에 따라 로타리우스 2세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똑같이 나누어 가졌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기원이 되었다.

3. 카롤루스 왕조로 시작된 유럽의 봉건제도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프랑크 왕국이 분열될 무렵, 서유럽은 다시 이민족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다.
동쪽에서는 유목민인 마자르족이, 지중해에서는 잠시 잠잠하던 이슬람 세력이 다시 공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더욱 파괴적인 것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내려온 뱃사람들이었다. ‘바이킹’으로 불렸던 이들은 해마다 여름이면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을 약탈하였고, 나중에는 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까지 휩쓸었다.

100여 년에 걸친 이들의 침략이 수습된 10세기 중반, 서유럽의 지도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특히 서프랑크 왕국(오늘날 프랑스)은 왕의 권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나라는 기사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영지로 나뉘었다.
이름만 남은 왕은 이 세력들을 인정하고 충성을 약속받는 데 만족해야 하였다. 그리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침략자들 앞에서 농민들은 성채와 무장을 갖춘 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대신,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부자유한 농민을 ‘농노’, 이들에게서 부역과 세금을 걷고 재판까지 할 수 있게 된 지배자를 ‘영주’라고 한다. ‘봉건 제도’라고 부르는 이 정치 제도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동프랑크 왕국과 영국 등 서유럽 주요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 서유럽은 정치적 분열과 크리스트교라는 정신적 통일성이 공존하는 세계가 되었다.
* 봉건제도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 받기위해 영주의 성에 농노들이 거주하면서 영주의 성을 지키는 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제도

영주의 성과 농가 (삼포제 운영 : 삼포제 : 휴경지, 춘경지, 추경지)
휴경지 : 말을 키우면서 말의 배설물로 땅을 좋게 함
춘경지 : 봄에 농사
추경지 : 가을에 농사
삼포제 경영
다음해에 좋아진 휴경지를 춘경지로 사용, 춘경지를 휴경지로 사용, 추경지를 춘경지로 사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