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8년, 고조선은 중국 한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왕이 살해되고, 도읍인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철기 문화를 꽃 피우며, 한반도와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고조선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한나라는 뺏은 고조선 땅을 다스리기 위해 네 개의 군현을 설치했다.
고조선 주변으로 이미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같은 나라들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고조선처럼 큰 세력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나라가 쉽게 다스릴 만큼 만만하지는 않았다.
또한 고조선의 세력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을 성장시키기 시작했다.(준왕이 청동기 문화를 보급시켰고, 고조선의 멸망 후 고조선의 유이민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 지역에 철기 문화를 전파시켰다.)
이 중 가장 먼저 나라다운 틀을 갖춘 곳은 부여로 쑹화강(중국 길림) 유역에 세운 나라였다.
부여가 왕을 세우고 나라의 틀을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부여는 원래 다섯 부족이 모여서 만든 나라로 이 중 가장 큰 부족의 우두머리를 왕으로 뽑았다. 하지만 왕은 왕이 머무는 지역만 다스리고, 나머지는 각 부족의 우두머리가 다스렸다. 이들을 대가라고 불렀는데, 대가가 다스리는 네 지역은 왕이 사는 도읍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여 초기에는 왕이나 대가나 자기가 속한 지역을 다스리는 권한이 똑같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사정이 달라졌다. 왕은 대가에게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참여하라는 통지를 보냈고, 대가는 즉시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또 전투에 나가서는 왕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부여의 왕은 실질적, 집중적 정치 권력을 갖진 못했다.(멸망 원인)
부여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흉년이 들면, 그 잘못이 왕에게 돌아와 왕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심지어는 죽는 경우도 있었다.
부여의 왕과 귀족들은 귀족회의를 열어 나랏일을 의논하고 결정했는데, 귀족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왕이라도 무조건 따라야 했다. 이와 같은 귀족회의는 주로 매년 12월에 시작되는 영고 축제 때 열렸다. (귀족회의=왕권이 약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귀족들은 네 지방을 다스리는 대표였는데 각각 마가, 우가, 저가, 구가로 불렸다.
귀족들을 부르는 말은 가축의 이름인 말, 소, 돼지, 개와 비슷한데 이는 당시 부여에서는 농사가 어려운 지형 탓에 가축을 기르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 일을 감독하는 귀족들의 호칭도 가축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의 윷놀이도 부여의 왕이 자신이 속한 부족을 포함해 다섯 부족에게 다섯 가지 집짐승을 나누어 주고 기르게 했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모여 어느 부족의 집짐승이 가장 많아졌는가를 내기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부여에도 고조선과 같이 법이 있었다. 부여의 법은 무척 엄해서, 도둑질한 사람은 물건 값의 12배를 갚아야 했고, 갚을 수 없을 때에는 물건 주인의 노비가 되어야 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했고, 그 가족도 노비가 되었다. 노비는 부여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부모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었다. 노비는 왕이나 귀족들이 소유한 물건처럼 취급되었으며, 재산도 가질 수 없고 마음대로 다닐 자유도 없었다. 또한 왕이나 귀족들이 죽을 때 함께 묻혀서 순장되었다.
또한 부여는 해마다 12월에 영고축제가 열렸다.
영고는 ‘북을 치며 신령을 맞이하는 굿’이라는 뜻으로 부여 사람들은 북이 활과 화살처럼 하늘과 통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농사가 잘 되도록 기원하기 위해 하늘 신에게 북을 치며 제사를 지냈다.
이 때의 제사장은 다섯 부족의 대표자인 왕이었으며, 다섯 부족이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이기 힘들었지만 영고 축제 때에는 모두 모여 농사와 사냥이 잘 되기를 빌었다.
축제는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들이 한 데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도 이 때 열렸으며, 한 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대비해 계획을 세우는 것도 이 때 행해졌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기도 하고,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하였다.
영고가 12월에 열린 이유는 부여는 산악 지역으로 12월은 극심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이다. 부여인들은 그동안 수확한 음식들을 모두가 나눠 먹으면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것으로 추위를 이기고자 했는데 특히나 땅을 힘차게 밟는 춤은 땅을 열심히 다져서 농사가 잘 되도록 도모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다(형사취수). 이것은 동생이 형의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여자를 돌려보내면 결혼할 때 여자 쪽 부족에게 내놓은 대가가 아깝기도 하고, 자손을 많이 낳아 종족의 힘을 키우려면 여자의 역할이 중요하기도 해서였다.
부여는 고구려와의 경쟁 관계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경쟁 관계는 200년대 전반까지 지속되다가 부여가 285년 선비족의 모용씨 세력의 침입을 받으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부여는 이 모용씨 세력의 침입으로 도읍이 함락되었고, 1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부여 왕 의려는 자살을 했고, 왕의 가족들과 관리들은 북옥저로 피난을 갔다. 의라가 왕위를 이어받고 사태를 수습하고 중국 서진이란 나라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선비족을 물리쳤지만 부여는 예전처럼 나라의 힘을 회복하지 못 하였다. 그 이후로도 모용씨 세력은 계속해서 부여를 침입했고, 많은 부여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서 중국에 노예로 팔려 갔다. 군사적 도움을 주었던 중국 서진도 멸망하여 더 이상 지원을 받을 나라도 없었다.
선비족은 날로 커져서 전연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부여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쇠약해진 부여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바로 고구려였다. 346년 고구려는 부여를 침입했고, 부여 왕 현이 잡혀가고, 5만여 명이나 되는 백성들도 포로가 되었다. 부여 왕실은 도읍이었던 길림을 떠나 서쪽 전연 근처로 쫓겨 갔다.
부여는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힘을 잃게 되었고,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부여를 공격하면서 부여는 왕성이 함락되었고, 지방의 세력가들 일부는 광개토대왕을 따라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부여 왕실은 고구려의 종속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부여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으며 부여는 457년 중국 북위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면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 힘썼다. 그 가운데 부여 동북쪽에서 물길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부여를 침입했고, 부여 왕은 물길과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가족들과 고구려로 도망을 갔다. 고구려는 문자명왕이 다스리고 있었고, 이 때가 494년으로 부여의 700여 년 역사는 끝이 났다.
* 반드시 시험에 나오는 부여 역사
1. 부여가 멸망한 원인 : 강력한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 여러 부족들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연맹왕국 단계로 멸망하게 된다.) : 매우 중요 : 가야 역시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하게 된다.
2. 부여의 제천행사 = 영고
3. 부여 귀족회의와 같이 고구려는 제가회의, 백제는 정사암회의, 신라는 화백회의가 있었다.
이와같은 회의는 귀족들의 세력이 강함을 의미한다.
4. 부여만의 특별한 성격 : 형사취수와 순장. 12책화ㅡ도둑질한물건12배변제 (많이 나진 않았요. 중학교 과정에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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