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역사가 어려운 중등, 초등이 미리 알아 두면 정말 좋은 역사 이야기 5) 북쪽의 여러 나라 - 동예, 옥저

수능까지 쉽게 가는 국사

역사가 어려운 중등, 초등이 미리 알아 두면 정말 좋은 역사 이야기 5) 북쪽의 여러 나라 - 동예, 옥저

초등공부로수능잡기 2022. 10. 21. 22:53
728x90
728x90
SMALL
 
 

삼로가 다스리는 마을이 있는 나라 – 동예, 옥저

부여가 나라의 기틀을 갖추고 성장할 쯤,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는 고구려, 동예, 옥조 등이 있었고, 평양 부근에는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있었다. 

이 나라들은 왕이 없는 작은 나라였고, 더 작은 단위의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모여 회의를 열었고, 회의는 나이가 가장 많은 어른이 이끌었다. 이 어른들을 삼로라 불렀다. 고구려, 동예, 옥저도 초기에는 이러한 모습이었으나 고구려는 세력을 키워 영토를 넓혀 갔고, 왕을 뽑아 다스리게 했지만 동예나 옥저는 작은 마을과 같은 모습이었다. 

동예는 동해안 일대의 작은 나라로 ‘동쪽에 사는 예족’이란 뜻으로 동예라 불리었고, 동예 안에는 불내국, 화려국이라는 작은 나라들도 있었다. 이런 작은 나라들을 모두 합치면 동예의 인구는 2만여 호 정도가 되었고, 옥저의 인구는 동예보다도 적어 5천 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동예와 옥저는 필요할 때만 힘을 모으고, 평상시에는 간섭 없이 지내는 연맹 형태의 나라로 왕이 없었다. (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힘이 없는 연맹왕국은 신석기 시대의 씨족 공동체가 다른 씨족과 결혼하여 형성된 부족 공동체의 연맹왕국의 형태를 지속하다 멸망하게 된다 : 부여, 가야, 옥저, 동예 )

동예와 옥저는 동해안의 북쪽 지역이라 앞쪽은 바다이고, 뒤쪽은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동예와 옥저는 만주나 중국 등으로 진출하지 못했으며 다른 나라의 침입도 적어 힘을 길러 강한 나라가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설치할 때, 이곳에도 부조현을 설치해 놓고 갔다. 이 후 옥저는 낙랑군이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힘을 잃을 때까지 낙랑군의 간섭을 받았다.

 

2. 동예와 옥저의 생활모습

동예와 옥저는 동해 바다와 가까운 곳으로 위아래 길게 뻗은 평야지대였다. 이곳은 농사도 잘 되고, 바다의 해산물도 풍부했다. 또한 육지 쪽의 높은 산으로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많지 않아 동예와 옥저만의 독특한 생활 모습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

 

동예의 집 : 동예 사람들은 땅을 약간 파서 반지하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 집은 겨울에 따뜻했으며, 앞쪽에 작은 방을 짓고, 뒤쪽에 큰 방을 덧붙여서 마치 한 자의 ‘여(呂)‘자처럼 보였다. 또한 동예 사람들은 함께 살던 사람들이 병들거나 죽으면, 살던 집을 불태우고 새 집을 짓고 살았다.

 

책화 풍습 : 동예에서는 마을별로 산과 강의 주인이 정해져 있어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를 어길 경우 다른 마을의 산이나 강에 들어가서 나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을 경우 노비나 소, 말 등으로 물어주는 책화의 풍습이 있었다. ( 자신들의 세력을 너무도 중시했기 때문에 부족간의 통합이나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이 힘들었다. 동예가 연맹국가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한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시험에 납니다. )

동예의 특산물 : 동예와 옥저는 동해 바다와 가까워 해산물이 많았다. 그 중 동해에서만 나는 반어라는 물고기 껍질은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이 외 과하마라는 작은 말이 있었다. 또한 단궁이라는 활도 유명했는데, 단궁은 고구려의 맥궁과 함께 가장 좋은 활이었다.

 

세골장 : 옥저에서는 길이가 10여 장(약 35.8m)이나 되는 큰 나무 곽을 만들어 가족 공동 무덤으로 사용했다. 큰 나무 곽 한쪽에는 문이 있어 가족 중 누군가 죽으면 다른 곳에 임시로 묻었다 나중에 뼈만 추려서 나무 곽 속에 차례로 안치하였다. 또한 나무 곽에는 죽은 사람의 수대로 사람의 모습을 새겨두었고, 질그릇 속에 쌀을 담아 나무 곽의 문에 매달아 놓았다.

 

민며느리제 : 옥저에는 결혼을 약속한 어린 여자 아이를 미리 데려와서 나이가 들 때까지 기른 후 며느리로 삼는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었다. 여자 아이는 어른이 되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 집에서 신부를 다시 데려가기 위해 돈을 지불했다.

3. 태풍을 몰고 온 고구려

부여 다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갖춘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를 갖추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해 갔다. 

먼저는 동예와 옥저를 정복했고, 다음으로는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과 공손씨 세력이 세운 대방군과 대적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한나라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였고, 313년 고구려는 낙랑군을 공격을 성공시켰고, 314년에는 대방군을 공격해 만주와 한반도 북쪽 모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56년-옥저와 동예 정복, 313년-낙랑군 정복, 314년 대방군 정복, 494년 부여 흡수)

* 반드시 시험에 나오는 부분 *

1) 동예의 책화 풍습 :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되는 풍습 

: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는 계기로 동예의 멸망 원인

2) 동예의 특산물 : 반어, 과하마, 단궁 (반어, 과하마 : 일제강점기 때 멸종)

3) 옥저의 세골장 : 가족 공동 무덤

4) 민며느리제 : 옥저의 결혼 풍습 : 어린 여자 아이를 데리고 와 양육 후 결혼하는 풍습

728x9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