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경북 경주) 지역에 사는 여섯 마을의 대표들은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자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황산 고야촌이었다. 이 여섯 마을을 중심으로 사로국이 일어났다. 사로국의 대표는 처음에 박씨 마을에서 나왔으며, 다음에는 석씨, 김씨 마을에서도 사로국의 대표가 나왔다.
석씨 집안의 시조는 석탈해였다. 석탈해는 쇠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으로 무기나 훌륭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 신비한 능력처럼 보였으며, 쇠로 만든 물건을 팔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석씨 집안에서 임금이 나올 수 있었다. 한편 김씨 집안의 시조는 김알지였다. 김알지는 황금 상자에서 태어난 아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로국은 알에서 태어난 세 집안 사람들이 다스렸다.
2. 우두머리 국가, 사로국
박혁거세는 임금이 된 후, 서라벌(경북 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렸다.
당시에는 사로국만 한 나라가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에만 열한 개나 있었다.
처음에는 이들 나라는 땅 크기가 비슷하고, 나라의 힘도 비슷했다.
그러다가 사로국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해 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사로국은 나라의 모양새도 갖추고, 땅덩어리도 커졌으며, 임금을 부르는 호칭도 바꾸었다.
사로국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는 '거서간'이라 불렸다. 이 때 사로국 주변의 나라들도 우두머리를 모두 거서간이라 불렀다. 그 때는 사로국이나 다른 나라의 힘의 차이가 별로 없어서 임금을 부르는 호칭도 같았다.
두 번째 임금인 남해 거서간은 남해 차차웅이라고도 불렀다.
차차웅은 무당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전해주는 특별한 사람이란 뜻이다. 임금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면, 신에서 사람들의 소원을 잘 전해 이루어지게 하고,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 주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임금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남해 차차웅이 죽자 그 아들 유리와 사위인 석탈해가 임금의 자리를 놓고 겨루었다.
떡을 물었을 때, 생긴 잇자국이 많은 사람이 임금이 되기로 하였고, 유리가 임금이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경험과 지혜도 많을 거라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이가 많을수록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잇자국이 많은 사람을 임금으로 뽑았고, 이사금이라 불렀다. 당시 사로국은 경상남도 일부 지역까지 땅을 넓혀 세력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로국은 거서간이 다스리는 작은 나라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임금을 부르는 호칭도 이사금으로 바꾸고, 주변 나라들과 차이를 두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사로국은 경상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정복한 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더욱이 박씨, 석씨, 김씨 집안의 우두머리들이 번갈아 가며 임금을 맡는 것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임금의 성이 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정치적 변화가 따랐고, 나라의 힘도 흩어졌다. 그러다 356년 내물 이사금이 임금이 된 후로부터는 임금을 부르는 호칭도 마립으로 바뀌었다.
3. 김씨세습, 마립간
마립간은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이 호칭에는 강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이때부터 김씨가 임금의 자리를 이어 가게 되었고, 이제서야 비로소 사로국은 경상도 일대의 진정한 우두머리 국가로 나설 준비가 된 것이다.
나라가 커지자, 사로국의 임금은 도읍에서 먼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방법을 궁리하였다. 먼저 정복한 지역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도읍으로 불러와 살게 하면서 그들을 감시하였다. 사로국의 도읍은 모두 여섯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를 6부라 한다.
임금도 6부 중에 '양부'라는 지역의 대표였다. 임금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나머지 5부의 대표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의논 후 결정했다.
임금이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인 마립간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마음대로 나랏일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또한 지방의 일도 세세히 간섭하지 못했으며 아직도 지방에는 예전의 우두머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임금의 얘기를 잘 듣지 않았다.
임금은 자신이 나머지 5부의 대표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금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만들어 썼으며, 온갖 장식으로 자신이 최고의 지배자임을 나타냈다.
지방의 우두머리에게는 금관과 모양은 같지만 한 단계 아래인 금동관을 내려 주었다.
금동관을 받은 지방의 우두머리는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임금은 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큰 무덤을 만들게 했다.
무덤은 하루에 200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동원되어 날마다 공사를 해도 6개월 이상 걸릴 정도의 큰 무덤이었고, 그렇게 왕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임금과 임금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으며, 화려한 금으로 옷을 장식하고, 금으로 만든 그릇도 사용했다.
임금은 살면서 누렸던 화려한 생활을 죽어서도 누리고 싶었고, 살았을 때의 생활을 그대로 옮겨 놓듯, 무덤에 화려한 금관과 칼, 금은 그릇과 보석을 노비들과 함께 묻었다.
나라의 힘이 커지자 사로국은 바깥 세계에도 눈을 돌렸다.
377년 내물 마립간은 처음으로 중국 전진이란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 때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기는 했지만 사로국이 국제무대에 나설 정도로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힘이 워낙 강해서 사로국은 고구려의 간섭도 많았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이들의 싸움에 가야와 왜도 참여 했는데 가야와 왜는 백제의 편에 들었다. 사로국은 고구려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고구려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백제 편을 들던 왜는 사로국을 자주 침입했다. 내물 마립간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왜군을 당할 수가 없어,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군사 5만 명을 보내와 사로국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고, 이 때가 400년이었다.
그 뒤로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으며, 왕족이었던 실성을 인질로 데려가 실성과 내물 마립간 사이를 이간질하여 원수가 되게도 만들었다. 내물 마립간이 죽자, 사로국으로 돌아와 마립간이 된 실성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인 복호와 미사흔을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보냈고, 또 내물 마립간의 첫째 아들인 눌지도 고구려에 보내 죽이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눌지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어 눌지는 먼저 실성을 죽이고 임금이 되었다.
눌지 마립간은 비록 고구려의 도움으로 임금이 됐지만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때마침 433년 백제의 비유왕이 눌지 마립간에게 사신을 보냈다. 눌지 마립간은 비유왕의 동맹을 수락하고 나-제 동맹을 맺었다. 또한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지원군을 보내어 돕기도 하였다.
481년, 고구려와 말갈군이 사로국을 공격하자 백제와 가야에서 지원군을 보냈다. 493년에는 이벌찬이란 높은 관직에 있던 비지의 딸이 백제에 시집까지 가게 되어, 사로국과 백제의 동맹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4. 신라의 전성기로 가는 발판을 마련한 지증 마립간
왜와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사로국은 여기저기 성을 쌓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특별히 자비 마립간 때부터 지증 마립간 때까지 새로 쌓거나 수리한 성이 무려 28곳이나 되었다. 지증 마립간은 임금에 오른 지 4년 째 되는 해 사로국을 신라라 칭하였다.
신라는 왕의 업적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에 널리 퍼진다는 뜻을 가진 말로 한층 강해진 왕권을 뒷받침 한 것이다.
또한 지증왕은 각 지방의 우두머리들이 왕의 지배를 받도록 지시하였다.
주와 군으로 지방을 나누어 다스리는 주군제를 실시하였고, 이를 계기로 신라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 것이다. 힘을 얻은 지증왕은 512년 이사부 장군을 보내어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했고, 이 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던 약소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 학습정리 *
1. 초기 신라의 박, 석, 김씨의 임금 변화는 정치적 변화와 나라의 힘을 흩는 부작용이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가야와 부여와 달리 연맹 왕국의 단계를 넘어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성장이 필요했고, 그 과정은 356년 내물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매우 중요)
2. 356년 내물 이사금은 왕의 호칭을 마립간으로 칭했고, 이 때부터 김씨의 왕위세습이 형성되었다. (*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 매우 중요 )
3. 사로국의 임금은 여섯 개의 지역을 6부라 칭했고, 임금 역시 6부 중 '양부'라는 지역의 대표였다. 임금은 나라의 중대사를 5부의 대표들과 회의를 열어 결정했다. 그러나 임금은 마음대로 나랏일을 결정할 수 없었고, 지방의 일을 간섭하지 못 하였다.
4. 내물 마립간 때 (가야, 왜, 백제) vs (사로국, 고구려)의 정세가 형성되었다.
13. 왜군의 침입을 고구려가 도와주었고 이 때, 왕족 실성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와 미사흔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보냈다. 또한 실성은 내물 마립간의 첫째 아들 눌지 역시 고구려에 보내 죽이려 했으나 고구려의 도움으로 눌지는 사로국의 임금이 되었다.
14.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의 간섭을 끊기 위해 백제(비유왕)와 동맹을 맺어 나-제 동맹을 형성했다.
15. 지증 마립간 때 사로국은 신라로 바꾸어 불렸고, 28개의 성과 주군제를 통한 왕권 강화, 이사부 장군을 통한 우산국 정복으로 강대국이 되었다.
(참고) (지증마립간) 13년(512) 여름 6월,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해 와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이며, 혹 울릉도(鬱陵島)라고 부르기도 한다. 땅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힘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복속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의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
5. 신라의 전성기, 법흥왕, 진흥왕
법흥왕 때, 신라는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나라로 바뀌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520년)하고, 관리의 등급을 정하는 방법으로 등급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히는 공복제도를 규정하였다.
이는 왕과 신하의 관복에 차이를 두어 왕의 권위를 세우고자 함이다. 더 나아가 517년 병부를 설치하여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게 하고, 531년 귀족 회의의 의장을 신하들 중에 뽑아 ‘상대등’이라 하였다.
이전에는 귀족 등이 상대등의 자리를 물려준 후 자신은 더 높은 자리에 올랐다. 또한 법흥왕은 모든 신하와 백성이 왕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를 바라며 불교를 공식 종교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의 반대가 심하였고, 하급관리인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후 정식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된다. 법흥왕은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정한 후, 국가 체제 정비가 마련되자 대외관계에 힘썼다. 먼저 고구려의 침략을 대비해 백제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으나 만약을 대비해 대가야와 동맹을 맺었다. 그 후 532년 김해의 김관가야를 탈환하기도 한다.
540년 진흥왕은 왕위에 오른 후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에 힘썼다. 먼저 백제의 성왕과 손을 잡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 먼저 백제의 성왕과 손을 잡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
신라와 백제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고구려는 당시 귀족들 간의 다툼으로 나라가 혼란한 상태라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빼앗긴 한강 상류, 하류를 나누어 가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553년, 진흥왕은 동맹국인 백제를 공격해 한강 유역의 백제땅을 모조리 차지했다. 신라의 이와 같은 처사로 백제의 성왕은 554년 신라를 공격했지만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백제가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신라와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백제에 지원군을 보냈던 가야군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마침내 526년 진흥왕은 신라 장군 이사부의 공격으로 함락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신라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의 땅을 정복한 후, 신라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항강 유역의 비옥한 땅과 그 땅의 풍부한 곡식으로 부유해 졌으며, 많은 백성들도 얻게 되었다. 또한 서해로 이어진 한강을 통해 직접 중국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이 떨어져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진흥왕은 이와 같이 자신이 정복한 지역을 기념하는 ‘순수비’도 세워 왕의 위엄과 넓어진 땅과 사람들을 잘 다스려 강한 신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학습정리*
1. 신라의 전성기는 법흥왕과 진흥왕이 집권했던 6세기 이다.
2.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관리의 등급을 정하는 공복제도를 규정하였다.
3.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하여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게 하였다.
4. 법흥왕은 귀족회의의 의장을 신하들중에 선출하여,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5.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었다.
6. 법흥왕은 대가야와 동맹하여 금관과야를 차지하였다.
7. 법흥왕은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8. 진흥왕은 한강 유역의 백제땅을 차지하고, 순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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