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의 여왕
한강 유역의 땅을 정복하고 천하 통일의 염원을 가졌던 진흥왕의 사후,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형 동륜 태자가 일찍 죽고 둥륜의 자식들도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3년만에 왕 노릇을 못한다 여겨져 쫓겨나고, 동륜 태자의 아들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진평왕은 진흥왕이 정복한 한강을 통해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는데 특히 유학생을 많이 보내 중국의 발달한 학문과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또한 산성도 수리하고, 국방에도 신경을 써서 진흥왕이 정복한 신라의 땅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딸만 둘이 있어, 자신의 뒤를 이을 왕위가 늘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평왕의 죽음 후, 신라의 왕위를 놓고, 신하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나 신라는 양쪽 부모가 모두 왕족인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골품제’가 있었다. 그래서 첫째 딸 덕만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왕이 바로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다. 선덕 여왕은 왕위에 오르자, 신하 을제에게 나랏일을 맡겼다. 여왕의 통치를 못 마땅히 여기던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귀족들의 불만은 잦아들지 않았다. 선덕 여왕은 승려 자장의 권유로, 여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황룡사’에 ‘9층탑’을 건설했다.
선덕 여왕의 노력에도 여전히 선덕여왕은 못 마땅히 여기는 귀족들이 많았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가까이 두고 위태롭게 왕 자리를 지켜 나갔다. 또한 한강 유역을 빼앗긴 고구려, 백제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선덕여왕은 백제의 적인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의 당성(경기 화성)을 공격해, 신라가 당나라와 교류하는 길을 끊어 버리려고 하였다.
이 무렵 신라의 군사적 요지인 대야성이 백제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는데,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의 성으로 이 때,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이 모두 죽었다. 김춘추는 이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중 647년 상대등 자리에 올랐던 비담은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신의 군대는 반란군을 완전히 물리쳤고, 이 와중에 선덕 여왕이 죽었다. 김춘추와 김유신 등 선덕 여왕을 도왔던 귀족들은 선덕 여왕의 사촌 여동생을 왕으로 추대했고, 두 번째 여왕인 진덕 여왕이 탄생했다.
진덕 여왕은 모든 정치를 김춘추에게 맡겼다. 위기를 넘긴 김춘추는 다시 왕실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나라의 제도를 개혁해 나갔다. 651년 집사부를 새로 설치해 왕의 명령을 받아 나랏일을 처리하게 했으며, 당나라와의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고구려와 백제의 계속되는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동맹국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큰 전쟁을 대비했다.
2. 신라인들의 생활
1) 농사 발달 – 쇠로 된 농기구 사용
지증왕은 백성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농사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단단한 쇠로 농기구를 만들고, 밭을 가는 데 소를 이용하도록 하였다.(우경 발달)
그러자 농사짓기도 훨씬 쉬워지고, 수확량도 늘어났다. 이전에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먹을 것을 수확했는데, 이제는 가족의 노동력만으로도 농사가 가능해졌다.
300년 대 이후 쇠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더욱 좋아지면서 농기구도 쇠로 많이 만들어 쓰게 되었다. 쇠로 만든 농기구는 이전에 돌이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보다 훨씬 단단해 땅을 깊이 팔 수 있고, 오래 사용할 수도 있었다. 특히 낫으로 곡식을 베면서 추수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 지증왕의 우경 : 502년 지증왕이 소에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새로운 농사법인 우경을 권장했다.
힘 좋은 소는 밭을 깊이 갈아서 잡초를 없애는 효과가 있고, 간편하고 빨라서 넓은 땅도 금세 갈 수 있었다.
2) 수레와 길 - 수확한 곡식, 집에서 만든 물건을 시장에 팔기 위해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가 생기면서 신라인들의 생활이 한결 편리해졌다. 더 나아가 수레가 다니기 쉽도록 길도 반듯하게 닦았다.
3) 저수지 – 관개수로 :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홍수를 대비하고, 가뭄을 대비하여 벼농사를 더욱 발전
4) 시장의 활성화
농사의 발달에 의한 수확량의 증가와 집에서 옷감을 짜는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
5) 시장을 관리하는 관청
소지 마립간 때부터 시장이 있었는데, 지증왕 때 와서는 시장의 여러 일을 맡아보는 ‘시전’이라는 관청을 둘 만큼 상업이 활성화 되었다. 시장에서 사람들이 거래하는 일을 나라가 일일이 나서서 관리했으며, 귀한 물건들을 거래하는 것을 더욱 엄격히 관리했다.
6) 골품으로 차별을 둔 사회
원래부터 서라벌에 살았던 사람들은 정복한 지역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같은 귀족이라 하더라도 신분에 차이를 두었고, 법흥왕 때에는 율령이 정해지면서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를 만든 후에는 귀족 간에도 상하 구분이 더욱 뚜렷해 졌다.
골품제에서는 신분을 골(骨)과 두품(頭品)으로 구분하여, 등급에 따라 오를 수 있는 자리를 정해 두었다.
골이 두품보다 높고, 두품은 등급에 따라 여섯 개로 나뉘었는데 등급에 따라 결혼 상대, 셜혼 방법, 사는 집의 크기, 옷 색깔, 탈 것 등의 종류도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골과 두품으로는 서라벌에 사는 사람들의 등급만을 나누었으며,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아예 이런 골과 두품에 들지도 않았다.
골품은 한 번 정해지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자기 등급의 관직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니 실력 있는 두품 신분의 사람들은 골품제에 많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진평왕 때 설계두라는 사람 역시 6두품으로 이러한 사회구조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의 군인이 되었다.
* 성골 : 유일하게 왕이 될 수 있었으며, 원래는 골의 등급이 하나였는데, 왕의 신분을 더욱 높이기 위해 성스로운 골(뼈)이라는 성골 신분을 만들었다.
* 진골 : 왕족이지만, 왕은 될 수 없었다. 신라에서 여왕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성골인 남자가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열왕 때에는 진골도 왕이 되었다.
* 두품 : 관리는 될 수 있어도 장군, 재상처럼 최고의 자리는 될 수 없다. 아무리 똑똑해도 예외는 없었으며,
두품은 6등급에서 1등급까지 나뉘었다.
7) 신라의 인재 양성, 화랑도
신라에는 비슷한 나이의 청소년들이 함께 모여 몸을 단련하고, 친목을 다지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진흥왕 때 나라에서 관리하는 화랑도로 자리를 잡았다. 화랑도의 첫 우두머리가 ‘위화랑’이어서 생겨난 이름이 ‘화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신라는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현명한 재상, 신하가 필요했고, 주변의 여러 나라와의 전쟁에 필요한 용감한 장수들이 많이 필요했다. 화랑도는 이런 인재를 기르는 곳이고, 화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개 15세 전후의 남자 청소년으로 화랑은 진골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낭도는 신분에 제한이 없었다. 30세 전후로 화랑도를 떠나 화랑은 주로 장수, 관리가 되고 낭도는 병사나 일반 백성이 되었다.
화랑은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의 다섯가지 규율을 지켜야 했다.
세속오계 –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 임금을 섬겨라
–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도로 어버이를 섬겨라
– 교우이신(交友以信) - 신의로 벗을 사귀어라
– 임전무퇴(臨戰無退) - 전쟁에 나가서 물러서지 말라
– 살생유택(殺生有擇) - 살생은 가려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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