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 러일전쟁의 배경 : 삼국간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 제1차 영국+일본 동맹 (1902) vs 러시아의 용암포 무단 점령(1902) )
- 러일전쟁(1904) :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 선언 : 중립 선언을 무시한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 한-일 의정서 체결 강요(1904.2) : 러, 일 전쟁 중 군사적 요충지를 마음대로 사용하게 됨
(참고) 한-일 의정서 : 일본은 대한 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ㆍ황실의 안전을 위하며 대한 제국은 이를 위한 일본의 신속한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본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여야 하고, 이 협정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는 체결할 수 없다는 따위를 내용으로 한다.
( * 중요 * 일본은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많은 토지를 군용지로 차지하였다 )
- 제1차 한-일 협약 체결(1904.8) : 일본은 재정과 분야에 외국인 고문 파견
- 러, 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 :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을 승인 받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음
(참고) 포츠머스 조약 : 미국 포츠머스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맺은 러일 전쟁의 강화 조약.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 관동주의 조차(租借) 따위를 정하였다.
* 조차 ( 租 조세 조 借 빌릴 차 )
: 특별한 합의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
*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랴오둥)를 할양받았으나
삼국간섭(독일,프랑스,러시아)에 의해 요동반도를 다시 중국에 돌려주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만주를 통과하여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연결되는 동청철도의 부설권과
관동주의 조차권을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상태였으나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뤼순(여순),
다롄(대련)을 재조차 형태로 할양받았다.
이후 일본 제국은 이 조차지를 '관동주'라 명명하고 통치 기관으로 '관동총독부'를 창설한다.
2) 을사늑약(1905, 제2차 한-일 협약)
- 배경 :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승인 받음
- 과정 : 이토히로부미를 파견하여 군대를 동원 후 황궁 포위, 고종 황제와 대신을 위협하여 조약 체결 강요
- 내용 : 대한 제국의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 통감부 : 을사조약에 따라 외교 사무를 관장하는 것으로 1906년에 설치되었으나 실제로는 내정 전반을 간섭함 )
3) 을사늑약에 대한 저항
- 언론 : 황성신문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 민영환, 조병세 등의 자결 항거
- 전국적 의병 활동 : 을사의병 및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
- 나인영(나철), 오기호 : 오적 암살단(자신회) 조직
- 안중근 : 이토 히로부미 사살
- 전명운, 장인환 : 외교 고문 미국인 스티븐스 사살
- 이재명:이완용에게 부상
( 을사오적 :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 묵인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을 말한다. )
( 안중근 :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였으며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대한 의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죽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
4) 헤이그 특사 파견(1907) : 고종은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 파견(이상설, 이준, 이위종)
( 헤이그 특사의 활동 :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일제의 만행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으로 회의장에 참석하지 못 하였다.)
5)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강제 병합
- 고종의 강제 퇴위 :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킴
- 한,일 신협약 체결(정미7조약, 1907) : 일본인을 각 부의 차관으로 임명
- 군대해산 :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로 군대 해산
-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음
- 일제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한-일 병합을 청원하도록 함
- 한,일 병합 조약(1910) 강제 체결 : 대한 제국의 국권 강탈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의 부속 각서 *
제 3조 다음 방법에 의하여 군대를 정리함
- 육군 1대대를 두어 황궁 수비를 맡기고, 기타 부대를 해산할 것
제 5조 중앙 정부 및 지방청에 일본인을 임명함 - 각 부 차관, 각 도 사무관
6) 항일 의병 투쟁
(1) 을미의병(1895) : 발생원인 : 을미사변과 을미개혁(단발령)
: 주도 세력 - 양반 유생 의병장(유인석, 이소응)과 농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으로
단발령 철회와 고종의 해산 권고 조직에 따라 해산
(2) 을사의병(1905) : 발생원인 : 을사조약
: 주도세력 : 양반 유생 의병장(민종식, 최익현 등), 평민 출신 의병장(신돌석)
: 을사조약 폐기 요구, 평민 출신 의병장의 활약
(3) 정미의병(1907) : 발생원인 :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 주도세력 : 유생, 농민, 해산 군인, 노동자 등 여러 계층(평민 의병장 다수)
: 해산 군인의 가담으로 의병의 전투력, 조직력 향상, 의병 전쟁 발달
: 13도 창의군 구성, 서울 진공 작전 전개(1908)
( 13도 창의군 : 정미 7조약 때문에 대한제국의 정규군이 해체되자,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쳐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목적에서 1907년 12월에 의병들이 경기도 옛 양주에서 조직한 연합 단체. )
( 서울 진공 작전 : 의병 유생장들이 1만여 명의 13도 연합 부대를 편성하고,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앞서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국외 동포에게 격문을 보내 허위가 이끈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으나 실패하였다.)
7) 의병 활동의 위축
-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 의병 투쟁이 치열하던 호남 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전개
- 독립군으로 재편 : 일부 의병이 만주,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
8)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의 활동
* 애국 계몽 운동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개화 지식인과 개혁적 성향의 유학자들이 전개, 개화 운동과 독립 협회의 정신을 계승
: 교육과 산업 진흥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여야 자주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
* 보안회(1904) : 러, 일 전쟁 중 일제가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반대 운동 전개
* 헌정 연구회(1905) : 근대적 입헌 정치 제도 마련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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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의 권위는 헌법에 정해진 바에 따라 존중할 것
- 정부의 명령은 법률 규칙에 정해진 바에 따라 복종할 것
- 국민의 권리는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자유로이 행사할 것
* 헌정 연구회는 1905년 윤효정, 이준, 양한묵 등이 조직한 애국 계몽 운동 단체로
입헌 정치의 수립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통감부 설치 직후 해산당하였다.
* 대한 자강회(1906) : 교육, 산업을 통한 자강 추구 /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 전개
: 윤효정이 장지연, 심의성 등과 함께 1906년 4월에 조직하였다. 교육 개발, 식산흥업, 외세 배격 등을 내걸고 전국 25개의 지회를 두었으며 월보를 발간하였다.
* 신민회(1907) :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등이 비밀리에 조직
: 자주 독립을 위한 민족의 역량 강화, 국권 회복과 공화정 수립 목표
: 교육, 산업, 문화 계발 : 대성학교, 오산학교 설립, 자기 회사, 태극 서관 운영
: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 만주 삼원보에 한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 신흥 학교 건립
(신민회의 목적 : 한국의 부패한 사상과 관습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발육과 산업을 개방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 문명국을 성립케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그 깊은 뜻은 열국 보호 아래 공화정체 독립국으로 함에 목적이 있다고 함)
* 국채보상운동 : 근대적 시설 개선 명분으로 대한 제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대한 제국이 막대한 빚을 지면서 경제 예속화가 심화됨에 따라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의로 시작되어 1907년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함으로 시작되었다. 대한매일신보 등이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고, 금주와 금연을 통한 모금 운동을 시작으로 여성들은 반지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낸 국민 주도의 경제적 자립 운동이다. 그러나 통감부의 탄압으로 실패하게 된다.
( 국채보상운동과 대한매일신보 : 양기탁과 베델이 이끌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사가 국채 보상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통감부는 영국 정부에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고, 국채 보상 기성회의 간사였던 양기탁을 성금 횡령 누명을 씌워 구속하기도 하였다.)